탐사('04~08)/서유럽 이야기

벨기에 4 : 플란더스의 개

창(窓) 2007. 12. 4. 16:35

빈에서부터 확인한 일기예보가 절대 맞지 않길 바랐지만 눈뜨자마자 바라본 아침 하늘에선 비가 흩뿌리고 있다.

7시, 식당은 어제와는 달리 차분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객실로 올라왔을 때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빈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저녁 8시.

이 아침, 호텔 체크아웃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직 둘러보지 못한 브뤼셀 쏘다니기.

가늘게 또 이따끔 세차게 뿌려대는 빗속을, 우산을 받쳐들고 그제 어제와는 조금 다른 루트로 브뤼셀을 둘러보기로 했다.

 

비가 내리니 지저분한 거리-브뤼셀은 그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꽤 지저분하다-가 정화되는 느낌이긴 하다.

호텔을 나온지 얼마 안 되어, 우산 사이로 또 새로운 만화 벽화가 보인다.

지금껏 만화에 특별한 애착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뜻하지 않게 발견되는 브뤼셀 거리의 만화 벽화는 마음을 들뜨게 한다.

 

흐린 빗줄기 사이로 왕립 미술관도 보이고, 왕궁도 나타나준다.

또다른 분위기에 빠져있는 월요일 아침, 전조등 켠 승용차들이 출근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가느다랗게 시작했던 가랑비는 어느새 세찬 빗발이 되어버렸고, 1시간 만에 겉옷과 신발이 비에 폭 젖어버렸다.

 

브뤼셀 그랑플라스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길, 어김없이 그랑플라스를 가로지르는데, 젖어있는 광장의 정취가 멋지다.

호텔에선 성능 좋은 히터가 우리들의 젖은 옷과 신발 때문에 잠시 수난이다.

옷과 신발을 말리는 그 잠깐 사이, 큰밥돌은 침대 위에서 눈을 붙이고 작은밥돌은 TV속 만화에 빠져 신나게 깔깔거린다. 

 

10시반, 지극히 사무적인 호텔 프론트 직원에게 객실키를 내밀며 체크아웃을 했다. 정말 너무나도 지나치게 딱딱한 표정.

여행을 다니며 여러 나라, 여러 도시의 호텔을 이용해 봤지만, 브뤼셀의 이 호텔처럼 메마른 프론트 직원들은 처음이다.

그에 반해 포터나 다른 직원들은 방긋방긋 친절.  잘 가라는 인사까지 건네준다. 

 

호텔을 나섰다. 여전히 빗줄기가 만만치 않다.

중앙역까진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지만, 캐리어를 끌고 걸어움직인다면, 분명 애써 말린 옷이 다 젖을 터.

마침 호텔 앞에 대기 중인 택시가 있다. 게다가 중앙역에 도착해 열차시각을 확인하니 10분 후 안트베르펜행 기차가 있다.

운이 이렇게 좋다니까. 

 

안트베르펜행 기차

우리 앞에 멈춰선 기차는 2층 기차.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은 뒤 얼마 안 되어 여자 검표원이 등장했다.

한적한 2층 기차의, 비 내리는 유리창 밖 정경이 운치 있다.

 

건너편 좌석에 엄마인 듯한 젊은 여자와 할머니 , 5-6살쯤 된 아이, 이렇게 세 여자가 앉아있다.

유리알 구르는 듯한 프랑스어가 귀에 붙는가 싶었는데, 잠시 후 할머니가 통화를 하며 툭툭 내뱉는 말은 네덜란드어인듯.

독일어 같은 파열음이 연속적으로 들리는 걸 보니 말이다.

 

안트베르펜 지하트램 역

브뤼셀 중앙역을 출발한지 40분 후, 안트베르펜에 도착했다.

궂은 날씨를 물리칠 재간이 없었기에 중앙광장까지는, 걷는 수고 대신 지하 트램을 타기로 했다.

그래서 화가 루벤스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후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는, 루벤스의 집은 외관마저도 볼 수 없었다. 

 

트램 역의 지하 계단을 올라 안트베르펜 마르크트 광장에 이르니 곳곳에 쌓인 눈이 질퍽하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지만 다행히 비도, 눈도 우릴 방해하고 있진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 큰밥돌의 몸짓과 손이 낯설다 싶었는데, 기차역에 맡기기로 한 캐리어를 아무 생각없이 계속 끌고 왔던 거다.

짧은 여행이라 작은 캐리어였지만 안트베르펜의 보도블럭을 끌고 다니기엔 쉽지 않았다. 그래, 우리 교대하자구.

 

루벤스 동상
안트베르펜 대성당

어쩌면 많이 생소한 도시, 안트베르펜.

벨기에 여행 일정을 짜면서 안트베르펜에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플란더스의 개' 때문이었다.

어릴 때 본 TV 만화시리즈 '플란더스의 개'는 주인공 네로의 순수함과 아로아와의 우정, 그림에 대한 열정을 아름답게

그려냈는데, 이 만화의 원작 동화의 배경도시가 바로 안트베르펜이다.

동화 '플란더스의 개'는 영국 여성작가 위다가 1872년에 발표했으며, 동화와 만화 속 성당은 안트베르펜 성모대성당이고,

네로가 할아버지와 함께 우유 배달을 하던 트램길은 바로 성당 옆 거리인 것이다. 플란더스는 플랑드르 지역을 뜻한다. 

 

안트베르펜 대성당

성당 입구에서 친절한 사내가 입장료를 받는다. 어린이는 무료.

고딕 양식의 성당 내부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화사한 빛을 반사하고 있다. 

그리고 성당 곳곳에 자리한 회화들, 네로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루벤스의 그림들이 성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깊은 감동의 시간을 보내고 성당 밖으로 나오니 만화 '플란더스의 개' 속 네로와 파트라슈가 새겨진 조형물이 있다.

원작동화보다 더 강한 흡인력으로 '플란더스의 개'를 알린 만화가 일본 것이란 걸 알리기 위함인지 일본어 설명까지.

그래도 네로와 파트라슈의 흔적을 보니 눈물나게 반갑다. 

 

네로와 파트라슈

빗방울은 떨어지는 듯하다가 그쳐준다.

안트베르펜 마르크트 광장도 벨기에다운 예쁜 건물들이 가득하다.

광장 한가운데엔 우뚝 솟은 동상이 있는데, 무언가를 던지는 포즈의 동상은 '안트베르펜'이란 지명의 유래를 얄려준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이 지역 항구를 오가는 화물선의 통행을 방해하는 거인-또는 폭군-이 있었는데, 이를 참다못한

어느 병사가 그 거인의 손목을 잘라 강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안트베르펜은 네덜란드어로 '손을 던지다'의 뜻이다. 

 

안트베르펜 마르크트광장

점심을 먹고 바다 쪽으로 가 보았다.

바다를 보러 나지막히 경사진 길을 오르는데 바다 냄새가 난다.

짭조름하다. 근데 바다가 뭐 이렇지, 트이지 않은 폭 좁은 바다도 바다이긴 했다.

지도상으론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꼬불꼬불한 해안선이 있는 지점이었다.

 

전망 괜찮은 바닷가에, 12세기엔 요새로 쓰였던 성이 지금은 해양박물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박물관 앞엔 거대한 몸집의 거인-전설 속 거인일까-이 주민들에게 위압적인 시선을 쏘고 있다. 

안트베르펜에선 기념품 안 사나, 내 물음에 큰밥돌이 얼른 대답을 던진다, 뭐 마땅한 게 있나

안트베르펜에서 세계 다이아몬드의 반이나 거래된다는데, 온김에 다이아몬드나 한 덩어리 사지~

 

해양 박물관

항공기 출발 시각까지의 여유를, 광장 지하쇼핑센터 카페에서 누려보기로 했다.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와 와플을 주문하고 있는데, 작은밥돌이 장난감 가게에 다녀온단다.

10분 만에 돌아온 녀석의 손엔 그녀석만의 금쪽 같은 세계가 들려있다. 

 

안트베르펜 중앙역에는 브뤼셀 공항행 직행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다리 아프다는 큰밥돌을 버스 승차장에 남겨두고, 작은밥돌과 역 주변 시찰을 했다.

역 오른편 골목마다 각종 음식점은 물론 가라오케와 나이트 클럽까지, 완벽한 먹고놀자 동네다.

 

아까 큰밥돌과 내게 말을 걸었던 수상쩍은 두 아랍남자가 여전히 버스 승차장 앞에 서 있다.

이 사람들, 공항버스가 도착했는데도 탈 생각도 안 하고 자기네들끼리 낄낄거리고만 있다.

게다가 이들과 일당인 듯한 두 여자가 등장했으니 작은밥돌과 난 버스 짐칸에 둔 캐리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 남자들, 잘 관찰해야 한다구. 우린 그들을 예의 주시했다.

주 둘이 세트로 소설을 써요, 소설을. 기가 막힌지 큰밥돌이 혀를 찬다.

출발 직전, 공항버스에 오른 남자들. 물론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브뤼셀 공항

삐비빅. 탑승구로 들어가는 검색대에서 경고음이 울린다. 또 큰밥돌이다.

큰밥돌이 뭐, 몸에 쇳덩어리를 숨기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검색대 통과할 때마다 부각된다.

검사요원이 꼼꼼히 큰밥돌의 온몸을 더듬으며 재검사를 한다. 물론 별일없음. 

 

빈으로 돌아오는 기내에서 잠시 잠이 들었나 보다. 어느 새 착륙을 알리고 있다.

늦은 밤, 하루 늦게 인터넷으로 들어온 한국 사극 속 하늘엔 벨기에의 하늘도 함께 떠 있다.

 

< 2007. 10. 29. 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