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2024 로마·피렌체·볼차노·빈

8월 29일 (목) : 처음 만난 빈 뮤지엄

창(窓) 2025. 1. 18. 13:06

새벽에 목이 컬컬하고 속이 부대껴 깼다가 잠시 취침 후 다시 기상한 아침, 좋은 컨디션은 아니다. 

세탁기를 돌리던 오전 8시, 숙소 앞 건물에서 엄청나게 큰 종소리가 울려 확인해보니 성당-현대적 건물-이란다.

오전 8시반을 넘겨 아침식사를 하고 어제 마리아힐퍼에서 받은 율리우스마이늘 아이스커피도 시원하게 마셔주었다.

 

오늘 빈 최고 기온이 33도로 예보되었는데, 로마와 피렌체는 37도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날씨다.

오전 10시, 숙소 바로 앞에서 77A 버스를 타고 9분 지나 Rennweg에서 71번 트램으로 갈아탄 다음 칼스플라츠에서 하차했는데,

지하철보다 시간이 약간 더 걸리지만 지하철도 어차피 환승-U3+U1-해야 하니 바깥을 볼 수 있고 한적한 버스+트램을 선택했다.

 

Wien Museum

늘 오전 일정은 상시 무료입장이 가능한 빈 뮤지엄이다.

이곳은 빈의 역사와 문화를 풀어낸 전시실과 이벤트센터, 교육스튜디오 등이 있고 어린이, 가족을 위한 무료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빈 뮤지엄 입구는 유리 파빌리온으로 멋스럽게 싸여 박물관 외부와 내부를 자연스럽게 이어주고 있다.

 

빈 경계의 변화
중세의 빈
1529년 오스만의 1차 빈 공격

박물관 전시실에선 시간 흐름에 따른 빈-현재 빈 구시가-의 경계와 구획 및 시대별 모형이 다양하게 볼 수 있으며,

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오스만의 빈 공방전에 관련된 자료와 그림도 다채롭게 전시되어 있다.

특히 뉘른베르크 인쇄업자가 펴낸 1529년 1차 빈 공방전 자료에는 슐레이만 천막이 있는 전쟁 캠프, 주요 전투 에피소드,

오스만의 잔혹 행위, 스파이로 추정되는 자들의 처형 등을 그려넣어 사건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1529년, 오스만제국은 헝가리 정복 후 중부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을 공격했다.

오스만의 술탄 슐레이만 1세는 10만명 이상의 군사를 이끌고 빈을 공격한 반면 빈의 군대는 2만여 명에 불과했으

빈은 성벽을 개축하고 식량 확보를 하는 등 철저히 대비했기에 여러 이유로 다급해진 오스만은 보름여만에 퇴각했다.

빈 성벽 건설 조감도(중간단계), 1609년
과거 빈의 성벽과 성문

1529년 오스만과의 공방전 이후 빈은 150년동안 거대한 요새를 세우게 되는데 1609년 성벽 건설의 중간 단계에 해당되는 시기,

빈의 가장 오래된 조감도가 전시실에 걸려 있다.

과거 빈의 요새-성벽-은 지하철 U3 Stubentor역 지상 지하에 지금도 남아있고, 구시가에서 지명에 tor이나 bastei가 붙어있는 

Stubentor, Schottentor, Neutorgasse, Stubenbastei, Mölker Bastei 등은 과거 성문이나 요새가 있던 지역이다.

 

오스만의 2차 빈 공격, 1683~1694

오스만의 2차 빈 공격을 다룬, 많이 알려진 회화(1683~1694)는 중요한 사건을 하나의 그림에 통합해서 표현했다.

왼쪽엔 지원군이 접근하는 모습을, 가운데는 격렬한 전투 장면을 묘사했고 오른쪽엔 오스만군의 후퇴를 그렸다.

 

1683년, 오스만투르크는 다시 빈을 공격했다. 
오스만 15만 대군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 성채를 포위하여 장기전에 돌입했는데, 당시 빈의 병력은 1만6천여명에 불과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대공 레오폴트1세는 교황청과 카톨릭국가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슬람에 대항하는 카톨릭연합군이

형성되었다. 오스만은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빈을 함락시키기 위해 포격으로 성채를 무너뜨리는 작전을 펼쳐 빈 일부를 점령했다. 


드디어 당도한 카톨릭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을 합쳐 9만명으로, 오스만보다 적은 병력이었다.

그러나 기병은 카톨릭연합군이 우세했는데, 연합군의 기병은 1만8천명이었다. 폴란드 기병대는 빈 외곽을 포위한 오스만 군을 공격했고

오스만은 물러나 결국 퇴각하였는데, 오스만 군은 이 전투로 2만명의 병사를 잃었고, 5천여명이 병사가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후 합스부르크는 오스만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했고 헝가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폴란드는 오스만에 빼앗겼던 지역을 되찾았다.

 

중앙홀
성슈테판대성당 모형

여러 층을 아우르는 넓은 중앙홀의 층고는 25m이다.

이곳은 프라터에 있던 무게 1.7톤에 길이 10m인 고래 조각품, Südbahnhof-남역. 중앙역 옛 명칭- 간판, 구시가 조각 원본,

성 슈테판 대성당 모형 등 대형 전시품들이 차지하고 있다. 

 

중앙 그림 : 마리아테레지아 (1717~1780)
섭리의 눈과 무염시태

초상화의 주인공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6세의 장녀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합스부르크의 상속권을 인정 받은 그녀는 여성 승계 불가였던 신성로마황제 지위는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승계하게 되지만,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뛰어난 정치가였다.

 

전시실엔 카톨릭의 주요 상징과 개념인 섭리의 눈과 무염시태 조형물도 있다.

'섭리의 눈'은 성 삼위일체를 뜻하는 삼각형 안에 세상을 보는 눈이 그려진 형태로, 그 주변으로 선이 뻗어나가는 이미지를 보여주며,

삼각형 안에 눈 대신 글자를 새기기도 한다. '무염시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순백의 옷과 푸른 외투를

입은 이미지로 나타나고 12개 별이 달린 왕관이나 후광 또는 발 아래 초승달의 도상을 지니고 있다.

 

가족 초상화, 1850년
성슈테판대성당(오른쪽위), 교역 상인(가운데아래), 커피하우스(오른쪽아래) : 1820~1830년대

전시실 한쪽 벽면엔 19세기 초중반 빈의 사회 양상과 문화 현상을 반영하여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

1850년 무렵의 가족 또는 친인척을 그린 그림들이 도열되어 있고, 1820~1830년대 도시 공간을 그린 그림도 눈길을 끌었다. 

 

1852년의 빈
Wien Museum

빈의 성벽이 남아있던 1852년의 도시 모형을 보니 지금의 빈과 많이 닮아있어 정겹고 반갑다.

구시가를 둘러싼 성벽은 19세기 후반 철거되었고 현재 그 자리는 팔각형의 넓은 대로 링슈트라쎄-링 거리-가 되었다.

전시실을 옮겨가다가 위층에서 바라본 유리 파빌리온, 그곳을 통해 보는 바깥 풍경이 싱그럽고 평온하다.

 

화장대와 책상이 결합된 여성용 가구(좌,1805) 및 잠금 장치가 있는 남성용 가구(우,1810)
창가의 소녀(좌,1849)와 꽃병(가운데,1817)
19세기 유명 극작가의 방

빈 시민들-귀족이나 부자 상인-이 19세기에 사용했던 그릇, 가구, 집기들이 매우 세련되고 화려하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저명한 19세기 극작가인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생활하고 일하던 공간도 재현되어 좋은 볼거리가 돼주었다.

 

엘리자베트 황후, 1855 : 18세
프란츠 요제프 1세, 1852 : 22세

빈 시민들이 사랑하는 엘리자베트 황후의 아리땁고 꽃다운 초상화다.

바이에른공주 엘리자베트(1837~1898)는 프란츠 요제프1세(1830~1916)와 1854년 빈에서 결혼식을 올리나 시어머니의 간섭과 통제로

고부 갈등을 겪는다. 1860년부터는 궁정을 벗어나 유럽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지냈지만 1889년 외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하고

엘리자베트 황후 자신은 불행히도 1898년 암살당한다.

 

가장 오랫동안 오스트리아를 통치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젊은 날도 우아하다.

동생의 장남인 페르디난트 황태자부부가 1914년 사라예보서 암살당하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는 1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된다.

4년에 걸친 이 전쟁으로 600년 동안 지속된 합스부르크 왕가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파니 엘슬러의 댄싱머신, 1840년경
도나우여신

빈 출신 파니 엘슬러는 성공적으로 유럽과 북미 순회 공연을 마친 1830~1840년대의 세계적인 스타였다고 한다.

공작 날개의 문양을 본딴 그녀의 댄싱 머신은 나비처럼 가볍게 날개를 펄럭이면서 아름다운 공연을 이끌어냈다.

회화로 둘러싸인 전시실에서 중심을 아우르고 있는 도나우 여신은 그리스신화의 아프로디테 같은 매무새를 하고 있다.

 

한스 마카르트, 샬럿 볼터, 1875
신선한 과일시장, 1895
빈 무도회, 1904

관람한 마지막 전시실, 빈 무대의 위대한 스타인 샬럿 볼터는 한스 마카르트가 매혹적인 고대로마 황후로 그려냈고 19세기말,

빈에서 가장 중요한 과일 시장은 도나우 운하에서 열리고 있었으며 20세기초, 시청에서 매년 열리는 무도회는 호화롭고 찬란했다.

5개층 박물관에서 0층부터 2층까지의 전시실을 2시간 가량 관람하고 나니 빈이라는 도시와 더욱 친밀해진 것 같다.

 

빈 박물관에서 3층 테라스 전망 : 왼쪽 카를성당
Wien Museum

숙소로 돌아올 땐 U4와 U3 지하철로 이동했다.

아침에 종이 울리던 숙소 맞은편 성당은 돈보스코 수도회 성당으로, 돈보스코는 19세기에 시성된 카톨릭 성인이라 한다.

오후 1시 40분, 숙소에 도착하여 검은빵, 치즈빵, 치즈, 요거트, 주스 등으로 간단하고 맛좋은 점심을 먹었다.

 

숙소 근처 U3역
돈보스코수도회 성당 : 숙소 맞은편
dm & Hofer

우리는 여행 전, 남편 노트북에서 넷플 계정이 로그아웃된 걸 알지 못했고 예전과는 달리 유럽에서 국내 계정으론 로그인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여행 내내 넷플릭스 시청을 못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드디어 훌륭한 해결책을 찾았다.

로그인돼 있던 핸드폰의 넷플 앱을 활용하여,  며칠 전에 시도했을 땐 소리와 자막만 나올 뿐 화면은 켜지지 않아 실패했던, 

TV로의 미러링에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넷플 재영접 기념으로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1~2회를 시청했다.

초반부 진행이 빠르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지만 졸면서 보게 되는 스릴러물로,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다.

넷플 시청 후엔 오랜 만에 오수를 즐기고, 오후 5시반 Hofer호퍼에 갔는데 남아있는 과일이나 채소가 거의 없었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중, 주방이 이상하게도 환기가 안 돼서 후드 위 상부장을 열어보니 이런, 배기관이 아예 없다.

후드는 눈요기였을 뿐, 냄새를 외부로 배출하는 배기관이 설치돼있지 않으니 환기가 안될 수밖에. 냉동실 부재에 이어 2차 쇼크다. 

오후 7시의 저녁 메뉴는 숙주와 야채, 버섯, 계란에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은 비빔밥 그리고 오이무침과 진미채다.

 

시청사 앞 광장 : 필름페스티벌
시청사 앞 광장 : 필름페스티벌

오후 8시, 시청사 앞 광장 Rathausplatz에서 개최되고 있는 필름페스티벌을 보러 나선다. 

늘 그러하듯 광장 초입은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음성으로 가득하고 대형 화면 앞은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로 가득하다.

그런데, 낮 기온이 식지 않았는지 여기 너무 덥다. 잠시 앉아있다가 시원하지 않은 지하철을 타고 시원하지 않은 숙소로 돌아왔다.

빈에 살던 15년 전엔 한여름 낮에도 선풍기 틀 일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 지구는 너무 뜨거워져 중증 질환을 앓고 있다.

 

오늘밤도 오타크링거 맥주와 함께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3회를 시청한 후 자정즈음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