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반, 세비야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빗소리에 남편이 잠에서 깰만큼 새벽엔 더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잠귀 밝은 난 왜 안 깬 걸까.



오전 11시반, 숙소에서 멀지 않은 메트로폴 파라솔로 간다.
2011년에 완공된 대형 목재구조물인 메트로폴 파라솔은 형태가 버섯과 닮아서 라스 세타스 또는 라스 세타스 데 세비야
las Setas de Sevilla라고도 불리며, 크기는 150m*70m, 높이는 26m라고 한다.
세비야 여행은 3번째지만 처음 보는 메트로폴 파라솔, 모양새와 규모가 너무나 압도적이다.



메트로폴 파라솔은 그 아래서만 올려보았을 뿐 위쪽으로 입장하지는 않았다.
서늘한 평일 오전인데도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건축물 아래쪽에 시장과 식당들도 잘 갖춰져 있다.



점심식사 장소로 가던 중 개성 넘치는 건물이 있어서 들어가보니 어느 미술대학이다.
회랑에 재미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신화와 카톨릭 등을 소재삼은 유명 작품들을 반전시킨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메두사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는 페르세우스 머리를 든 '메두사의 복수'로, 라오콘 군상-라오콘 제사장과 두 아들-은 '라오코나'-
한 여자-로, 성세바스찬과 헤라클레스는 '세바스티아나'와 '헤라클레아'로, 원반 던지는 남자는 '원반 던지는 여자'로 표현했다.



오후 1시, 복잡하지 않고 한적한 '파티오 산엘로이'에 들어섰다.
여행객에게 알려진 식당을 찾아다니는 성향은 아니지만, 이 타파스 식당은 세비야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을 듯하여 방문했다.



이곳에선 바에서 음료와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한 후 직접 다 들고가서 좌석에 앉으면 된다.
우린 문어샐러드와 새우감자샐러드와 하몽 그리고 맥주와 제로콜라를 주문했는데 모든 타파스가 다 맛있지만
특히 하몽이, 육류와 햄 등을 즐기지 않는 내게도 정말 맛있었다.
산엘로이 근처 1885년에 오픈한 '라 깜빠냐'에서 크림빵을 포장한 후, 숙소에서 휴식이다.



오후 3시 20분, 세비야 알카사르로 향한다.
세비야 알카사르는 매주 월요일 폐관 2시간 전-계절따라 변동-부터 무료 입장이 가능하고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면 된다.
우리가 여행한 10월엔 오후 4시부터 2시간 동안 무료 관람이 가능했다.
알카사르 사자의 문 앞, 4시라고 쓰여있는 푯말 앞에 줄을 섰고 3시 50분이 되자 입장이 시작되었다.
입구에서는 예약 티켓의 큐알코드를 확인한 후 가방과 소지품은 검색대를 통과했다.


세비야 알카사르는 이슬람과 스페인의 건축 양식이 조화된 무데하르 양식으로 건립된 궁전이다.
무어인들이 스페인을 점령했을 때는 요새였으나 카스티야 왕 페드로 1세가 궁전으로 재건축하였다고 한다.


월요일이라도 세비야 여행객은 이스탄불에 견줄 만큼 너무 많고, 무료입장 시간인 알카사르에도 미어터질 만큼 많다.
이곳에서 주어진 시간은 2시간, 모든 장소를 여유있게 상세히 관람할 수는 없으니 가볍게 둘러보려 한다.
궁전 먼저 그리고 정원은 그 다음에,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가 본다.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진 아치 기둥과 멋스러운 회랑이 있는 공간-알고보니 '소녀들의 안뜰'-을 지나, 대사의 방에 멈추었다.
깊은 우주 같은 천장은 금빛으로 빛나고, 벽면과 기둥엔 화려하고 섬세한 타일 장식이 아름답다.



그런데 알함브라 나스르궁의 '아라야네스 안뜰'이나 '사자의 중정' 같은 곳이 알카사르에도 있다던데 왜 안 보일까.
궁전 들어오자마자 관람한 '소녀들의 안뜰'이 바로 그곳이었는데, 우린 그게 그건 줄도 모르고 '소녀들의 안뜰'을 찾아다녔다.
알카사르에 대한 예습을 외면했던 이유도 있으나 '작은 알함브라'라는 별칭 때문에 기대가 컸던 탓이기도 하다.
암튼 오락가락하면서 타일 전시실에도 가고 거대한 태피스트리 전시실에도 가게 되었으니 괜찮은 유희였다.



알카사르의 정수는 정원인가 보다.
정원 초입에서 만난 긴 연못에, 푸른 하늘과 나무와 헤르메스와 건축물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정원 전체를 볼 수는 없었으나 눈길 가는 곳마다 나무와 분수와 물이 가득했다.
정원 바닥의 물길과 분수 그리고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이슬람식 조경이 참으로 멋스럽다.
이 공간을 걷고 이곳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온하고 평화로워졌다.



오후 5시 50분, 강한 억양의 스페인어를 쏟아내는 직원들이 관람객들을 내보내기 시작한다.
오래 머물지 못해서 아쉬운 정원을 한번 더 눈에 담으면서 알카사르를 빠져나왔다.



숙소 가는 길, Domi Velez 빵집에서 둥근 곡물빵을 구입하고 또 까르푸에도 들러준다.
저녁 메뉴는 라면 사리를 넣고 치즈를 올린 떡볶이, 말이 필요없는 맛이다.
그런데 까르푸에서 산 캐슈넛을 먹어보니 날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팬에 달달 볶아주면 된다.
판타지 설정의 12년 전 드라마 '너목들'을 또 재생한다.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 한다. 옛날에 분명히 보았던 드라마인데 기억이 안 나니 말이다.
망각을 핑계삼기 아주 좋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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