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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 [여행일기]/2025 리스본·세비야·마드리드

10월 28일 (화) : 감동의 세비야미술관

기온이 부쩍 낮아졌다. 어제처럼 오늘도 최저 17도, 최고 24도로 예보되어 있다.

알람은 늘 오전 7시반으로 맞춰두지만 6시반이면 깬다. 시차부적응도, 나이탓-서울에선 7시반 기상도 버거움-도 아닌데 말이다.

 

알카사르에 앞에서 본 대성당
이 멋진 길

오전 8시 45분, 평소보다 좀 일찍 나왔더니 사람은 적으나 식재료를 배달하는 탑차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오스트리아나 독일의, 딱 오전 7시 풍경이다. 저녁형 인간이 사는 지역과 아침형 인간이 사는 나라는 확연히 다르다.

 

대성당과 알카사르 주변을 천천히 산책하다보니 단체투어객을 비롯한 여행객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17년 전 기억을 상기하다가 세비야 구시가를 며칠동안이나 돌아다녔건만, 못본 건축물이 떠올랐다.

어디로 가더라, 잊고 있던 길-전에 많이 오가던-과 콜럼버스 기념탑을 구글맵으로 찾아 마주하니 그야말로 감회가 새롭다.

 

콜럼버스 기념탑
빵집&카페 Domi Velez : 아메리카노와 카푸치노

구시가와 주변을 2시간쯤 돌아다녔으나 커피 마실 곳을 찾지 못했고 결국 숙소 근처 Domi Velez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 

숙소 앞 거리에 있는 오렌지샵에 들렀고, 맞은편에 위치한 신기한 비대면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은 오늘에야 인지했다.

 

오렌지샵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 : 벽면의 낙서들

아침 일찍부터 나다녔으니 오후 일정을 위해 제대로 쉬어줘야 한다.

잘 먹고 잘 쉬고 오후 2시 50분, 17세기 궁전을 전시장으로 꾸민 세비야미술관으로 간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오늘 오후엔 산타마리아막달레나성당과 추로스가게에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성당은 오전 2시간과 늦은 저녁 2시간만 문을 열고, 추로스 가게는 오전에 딱 4시간만 영업하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여정은 내일 오전으로 미루고, 내일 오전에 갈 예정이었던 세비야미술관을 오늘 오후에 가기로 한 것이다.

 

세비야미술관 맞은편, 무리요 동상
세비야미술관 외관과 입구
세비야미술관 0층 중정

세비야미술관은 평일-월 휴무-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문을 열고, 입장료는 1.5유로-현금만-다.

성당들까지 비싼 입장료를 받아내는 스페인에서, 도시 이름을 내건 미술관 입장료가 이렇게 저렴하다니 신기하다.

세비야미술관엔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스페인과 세비야 회화를 중심으로, 스페인 조형물과 유럽 회화가 전시되어있다.

 

알레호 페르난데스, 1508, 수태고지
마르틴 데 보스, 성프란치스코(좌).최후의심판(중).성아우구스틴(우), 1570
엘그레코, 그의아들 호르헤 미누엘의 초상화, 1600경 (2전시실)

스페인이 카톨릭국가인 만큼 미술관 내부엔 카톨릭 종교화가 가장 많다.

'수태고지'에 이어, 시선을 끈 작품은 세비야 성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성당의 제대화였던 '최후의 심판'이다. 

또한 2전시실을 압도하는 작품은 멀리서도 존재감이 폭발하는 엘그레코의 초상화였는데, 무엇보다 그림 속 인물이 아주 멋졌다.

 

4전시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사도의 얼굴, 1620 (4전시실)
디에고 벨라스케스, 크리스토발 수아레스 데 리베라의 초상, 1620 (4전시실)

한적한 미술관은 고마운 선물이다.

유명 미술관은 인파로 미어터지다보니 본래 목적인 감상에 매진하기가 쉽지 않은데, 여유로운 이곳은 감상에 최적화되어있다.

4전시실엔 스페인 최고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의 회화들이 전시되어있고, 두 그림은 서로 정취가 사뭇 다르다.

 

알론소 바스케스, 최후의 만찬, 1588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원죄없는 잉태(무염시태), 1650

'인원 제한'이라 쓰인 전시실, '십자가 못박힌 예수'가 제대화처럼 걸려있고 천장마저 돔이라 궁전 성당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대형 회화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내 눈에 든 작품은 알론소 바스케스의 '최후의 만찬'과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무염시태'다.

 

알론소 바스케스(1565~1608)는 스페인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시기에 활동한 매너리즘 화가다.

그는 성서 속 에피소드나 성인들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고 그의 회화엔 매너리즘 특징인 왜곡과 변형, 기교가 드러난다.

'최후의 만찬'은 세비야 성파울라수도원에 있던 종교화로, 구도를 비롯하여 배경과 인물 묘사가 역동적이면서도 독특하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그림은 예전에 접한 기억은 있으나 이렇게 큰 회화를 이토록 상세히 본 건 처음이다.

벨라스케스나 엘그레코를 제외하면 서로 엇비슷한 17세기 스페인 회화들 중에서 무리요의 '무염시태'는 군계일학이었다.

성모의 얼굴과 표정이 말도 안되게 아름답게 묘사되었고 대상을 표현한 선과 색채가 너무나 곱고 부드러우며 우아했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는데 벽체 너머엔 예상치 못한, 수많은 무리요의 그림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무염시태, 1669 (좌)/ 수태고지, 1666 (중)/ 그리스도를 안고있는 성프란치스코(우), 1669경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그리스도를 안고있는 성프란치스코(좌).무염시태(중).파도바의 성프란치스코와 아기예수(우), 1669경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목동들의 경배(좌).성펠릭스와 성모자(중).성토마스의 자선(우), 1668경

세비야 출신의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는 17세기 스페인 바로크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카라바조 영향을 받은 초기엔 강한 명암 대비가 드러나는 그림을 그렸고, 이후에 그린 종교화에는 스푸마토 기법을 활용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그림들은 대상의 선이 명확하지 않고 안개처럼 부드럽게 묘사되었으며, 곱고 우아한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무염시태'들 속 성모는 곱디고운 미인으로 표현했고 회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잘 생기고 예쁘게 묘사되었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피에타. 1666경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 1650경 (75x58cm)
무리요 회화 전시실

무리요 전시실에서 다른 그림들과 차별화된 작품은 '알렉산드리아의 성카타리나'다.

무리요의 초기작인 이 그림은 바로크 미술의 문을 연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명암 대비를 극명하게 드러낸 그림으로,

손에 든 칼-참수형-과 종려나무 가지-순교,천국-를 성카타리나의 도상-쇠갈퀴 바퀴도 대표 도상-으로 표현했다.

성카타리나는 어두운 배경에 반신만 실루엣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녀의 당당한 시선은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다.

 

미술관 중정
미술관 중정과 회랑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참회하는 성히에로니무스, 1665/ 성프란치스코의 성흔, 1650/ 슬픔의 성모, 1665 (7전시실)

2개층으로 이루어진 미술관은 아래층엔 1전시실부터 5전시실까지, 위층엔 6전시실부터 14전시실까지 있다.

위층 전시실로 가려고 계단으로 향하는데, 관람하는 동안 비가 내렸는지 중정이 폭 젖어있다. 

위층에서 처음 만나는 화가는 계속 이어서, 무리요다. 이쯤되면 세비야미술관은 무리요판이다.

 

프란치스코 구티에레즈, 트로이의 화재, 1657
프란시스코 바레라, 봄, 1638
코넬리스 노르베르투스 기스브레히츠, vanitas바니타스, 1660

위층에서 마주한 회화들은 다양화된 느낌이다.

카톨릭 종교화가 여전히 많지만 그리스신화를 소재도 한 작품도 있고 정물화, 역사화, 초상화도 꽤 전시되어있다.

17세기 플랑드르에서 유행했던 소재였던 'Vanitas'-공허, 허무, 덧없음-도 있었는데, 해골과 꺼진 촛대, 시든 꽃을 소재로 삼았다.

 

수르바란의 공방, 성카타리나, 1650/ 성아네스, 1650 (6전시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성암브로시오.성그레고리오.성히에로니무스, 1627 (10전시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1640 (10전시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1598~1664)은 17세기 스페인 회화를 이끈 화가로,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다.

위층에 전시된 평작들 속에서 시선 끈 작품 중 수르바란의 것들이 많았는데, 수르바란은 테네브리즘을 정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특히 극명한 명암을 대비-테네브리즘,키아로스쿠로-시킨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앞에서는 경건하고 엄숙하며 정중해져야 했다.

 

넵튠-포세이돈-의 전차, 17세기초 (소금통)
후안 데 에피날, 베누스와 불카노(아프로디테와 헤파이스토스), 1760년
프란시스코 데 고야, 호세 두아소 신부의 초상, 1824 (11전시실)

포세이돈 조형물-소금통-을 보고,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를 만나고, 19세기 스페인화가 고야까지 잘 만났으나

14개 전시실 중 19~20세기 스페인 회화, 세비야 회화를 전시한 위층의 12,13,14전시실은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있다.

2시간 넘게 기쁘게 관람을 한 후 미술관을 나오는데, 오후 6시가 다 된 시각인데도 입장하는 관람객이 많다.

 

만석인 피자리아에서, 나흘 전 먹었던 피자를 오늘은 2판 포장했다.

기대없이 찾은 세비야미술관은 커다란 감동을 내주었고 그 깊이만큼 고단함도 깊다.

곧 푹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