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표류 [여행일기]/2025 리스본·세비야·마드리드

11월 2일 (일) : 레이나소피아에서 만난 바다

숙소 침실 전망

느긋하게 늑장 부려도 되는 아침.

식사를 하고, 커피머신으로 내린 스타벅스캡슐커피를 마신 후 모레 갈 세고비아에 관한 유튜브까지 시청했고,

맑고 푸른 오전 11시반, Arte역 근처 레이나소피아미술관-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에 도착했다.

 

마드리드 레티로공원 서쪽엔 이 도시에서 손꼽히는 3개의 미술관이 있다.

오늘 가는 레이나소피아미술관이 가장 남쪽에 있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700m쯤 가면 프라도미술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가던 방향으로 다시 400m만 가면 티센보르네미사미술관이 있으니 그야말로 동네가 미술관 벨트다.

 

레이나소피아미술관
온라인예약자 입구 : Roy Richtenstein로이 리히텐슈타인, Brushstroke붓질, 1996 (왼편 조형물)

Arte역에서 바로 이어지는 레이나소피아미술관, 그 앞 광장 벤치에 잠시 앉아있다가 출입문 쪽을 둘러보니 안내문이 있다.

미술관 무료입장시각에 온라인예약자가 입장할 수 있는 장소-신관-가 안내되어있는데, 반바퀴 돌아가니 유리 천장이 있는 외부 공간이

나온다. 신관 쪽엔 10m가 넘을듯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조형물이 있고 다른 한쪽 야외엔 카페가, 다른 건물 지하엔 도서관이 있다.

 

레이나소피아미술관은 평일-화요일 휴무-과 토요일엔 오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요일은 낮 12시반부터 오후 2시반까지

무료 입장이 가능하고 홈페이지에서 미리 예약하면 된다.

입구 앞엔 이미 대기줄이 길었고 12시5분 우리도 대기줄에 합류했는데, 잠시 후 대기 인파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정확히 낮12시반, 예약확인서의 큐알코드를 확인한 후 입장을 했고 우리는 계단을 올라 곧장 2층으로 향했다.

 

파블로 피카소, Guernica게르니카, 1937 (349×776cm)
파블로 피카소, Guernica게르니카, 1937 (349×776cm)
'게르니카' 전시실을 나온 후 : 대기자들

레이나소피아미술관은 18세기 병원 건물을 개조하였고 건물 외벽에 노출된 유리 엘리베이터가 인상적이며, 우리가 입장한 신관은

프랑스 건축가가 설계하였다. 이곳엔 주로 20세기 현대 미술작이 전시되어있고 스페인 작가들의 혁신적인 작품이 많다.

 

우리가 레이나소피아미술관에 온 건 처음은 아니다.

빈에 살던 2008년 여름, 식구 셋이 마드리드와 안달루시아를 7박8일간 여행할 때, 마드리드 미술관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던 우리는

소피아와 프라도 중 소피아를 골랐다. 아이와 함께 방대한 프라도를 돌아다닐 자신이 없기도 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현대미술엔 별로

관심이 없으나 '게르니카'는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미술관 2층으로 바로 올라온 이유 역시 '게르니카'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 중 나치독일과 이탈리아공군이 스페인 북부 게르니카를 폭격-1937년 4월-한 참상을, 피카소는 '게르니카'로 완성했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세로 349cm, 가로 776cm에 달하는 대형 그림으로, 전시실에 오직 이 작품만 전시되어 있다.

다시 보아도 작품 크기와 내포한 의미가 참 대단하다. 이 거대한 그림을 6주 만에 완성했다는데, 역시 큐비즘이라 가능한 것이다.

 

앙헬레스 산토스, Un Mundo 세계, 1929 (3m*3m)
알폰소 폰세 데 레온, 자화상, 1936

여러 전시실에 걸린 현대 회화를 보고 있으려니 그다지 구미가 동하지 않는다.

화가들이 지극히 자체적이고 주관적으로 그린 그림을, 우리가 굳이 그 주제와 의미를 파헤칠 필요가 없어보인다.

레온의 '자화상'은 자신이 겪은 자동차 사고를 모티프로 삼은 것으로,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린 몇 달 후 사망했다고 한다.

 

조셉 데 토코레스, 루이스와 베르트의 초상, 1921
로사리오 데 벨라스코, 아담과 이브, 1932

화면 전체를 평온해 보이는 인물과 상황으로 채운 그림들은 서정적 정취가 있어 꽤 괜찮다.

토고레스가 그린 '루이스와 베르트의 초상'은 후원자 칸바일러가 의뢰한 작품으로, 칸바일러의 아내와 처제를 그렸으며

벨라스코의 '아담과 이브'는 고전적 주제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했다. 

 

살바도르 달리, 창가의 인물, 1925

최고의 서정성이 부여된, 레이나소피아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살바도르 달리의 '창가의 인물'이다.

살바도르 달리가 초현실주의로 넘어가기 전, 그의 초기작인 사실주의 작품 중 여동생인 안나 마리아를 모델이 그림이 많은데

1925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전시된 17점 중 6작품의 모델이 안나 마리아였다고 한다.

 

이 작품은 창 밖으로 보이는 카다케스 바다와 풍경을 보고 있는 동생의 뒷모습을 조화롭게 표현하고 사랑스럽게 묘사했다.

나는 꽤 오래 이 그림 앞에 서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눈은 그녀의 시선이 되어 창문과 창 밖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후기 :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 1937 (좌) / 게르니카 후기 : 손수건을 들고 우는 여인, 1937 (우)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후가: 우는 여인의 얼굴, 1937 (좌) / 게르니카 후기: 손수건을 들고 우는 여인의 얼굴, 1937 (우)
파블로 피카소, 수영, 1934

전시실을 가장 많이 채운 작품은 피카소의 큐비즘 회화들이다.

해체하고 투시하는 기법이 내 시선엔 안락하지 않아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흥미도 적은 편이다.

그렇다고 꼭 아카데미즘을 선호하는 건 아니고 테네브리즘이나 마니에리스모, 사실주의, 낭만주의 회화에도 관심이 지대하다.

 

호안 미로, 머리, 1927
호안 미로, 그림 (달팽이,여자,꽃,별), 1934

개성이 지배하는 현대 미술이라지만, 가볍고 단순한 호안 미로의 가치는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어린아이가 쉽사리 그린 포스터 같기도 하고 멋대로 그리다가 망친 붓질 같기도 하고 생각을 담다가 포기한 낙서 같기도 하다.

 

살바도르 달리, 위대한 자위자의 얼굴, 1929
살바도르 달리, 끝없는 수수께끼, 1938

또, 살바도르 달리다.

몇 작품은 초현실주의 스타일이고, 다른 몇 그림은 사실주의에 가까운 것들이 전시실에 걸려있다.

스페인 프랑코에 밀착하여 독재정권을 지지하였으니 '창가의 인물'만 아리따울 뿐, 이 자의 생애는 지지할 수 없다.

 

살바도르 달리, 정물 ,1924
살바도르 달리, 루이스 브뉴엘의 초상, 1924

2층에 전시된 스페인 회화만 보고 나왔더니 그림 보는 데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른 현대 미술은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심미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만족스럽다.

 

레이나소피아미술관 복도
레이나소피아미술관 앞

레이나소피아미술관 앞 계단에서 색소폰 연주가 힘차게 울려퍼진다.

긴 머리에 청스커트를 입은 남자 연주자는 졸고 있는 강아지와 함께 있었는데, 짙은갈색털을 지닌 녀석이 참 짠하다.

세비야에서처럼, 아직 겨울은 멀었건만 노점에서 퍼지는 군밤 굽는 연기가 온 거리를 뒤덮고 있다.

 

레티로공원 울타리
레티로공원
레티로공원

가려 했던 미술관 주변 식당이 그새 만석이다.

어지간해서는 식당에서 줄 서지 않은 우리기에 망설임없이 근처 KFC에 앉았다. 

오후 2시반, 전체 면적이 1.25㎢나 되는 레티로공원 남서쪽 출입문으로 들어선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레티로공원의 장미정원
레티로공원의 장미정원
레티로공원의 장미정원

장미정원이 나타난 걸 보니 레티로공원을 나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레티로공원 남동쪽에 조성된 장미정원, 만개한 시점엔 아주 예뻤을텐데 장미꽃은 1/4쯤만 남아있다.

공원 남동쪽에 단테 문이라 이름 붙은 출입구로 가는 길은 편안한 내리막길이다.

 

레티로공원 출구 (남동쪽)
레티로공원에서 숙소 가는 길

오후 7시반, 양파와 양송이 그리고 새우를 듬뿍 넣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을 먹었다.

미술관에서 비축한 체력을, 뜻하지 않게 레티로공원-걸은 거리만 1km 넘음-에서 다 써버렸고 내일 일정도 만만치 않으니

일찍 취침해야 한다. 다만, 남편은 새벽에야 잠들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