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렌지에 2분이면 데울 즉석밥을, 끓는 물에는 15분 이상 넣어둬야 하니 아주 불편하다.
그래도 전자렌지 구비 유무가 숙소 선택의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고, 팔레르모와 시라쿠사에선 전자렌지가 있었으니 감사히 여기면 된다.
그리고, 아침 북엇국은 안 마신 술-남편만 맥주 1캔-도 해장하는 마력이 있다.


며칠 전 구입한 교통 티켓을 다 쓰고 타바끼에 들러 오늘 사용할 1일권을 구입했다.
처음 타는 434번 버스는 해안도로 따라 바닷가를 달리면서 도시의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오전 10시 20분에 하차한 곳은 아치 트레차 Aci Trezza라는 바닷가 마을.
정류장에서 바다로 향하다보니, 실버패키지 여행객도 있고 중1쯤 되는 학생단체도 있다.
그 중 학생 하나가 차이니스라면서 애매한 발언을 했고, 나는 녀석을 향해 단호히 '노. 코리아'라 답했다.



오늘도 어제처럼 맑지 않은 날, 동네 하늘에 구름이 한가득이고 바다도 마찬가지다.
마을명 중 아치Aci는 이 지역을 흐르는 강 이름으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 아키스Aci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네레우스의 딸인 바다 요정 갈라테이아를 짝사랑한 폴리페모스-외눈박이거인 키클롭스 중 하나-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갈퀴로 곱슬머리를 빗고 낫으로 수염을 깎아 외모를 단장했으며, 거대한 갈대로 피리를 만들어 세레나데를 연주했다.
그러나 갈라테이아는 잘생긴 양치기소년 아키스와 사랑하는 사이였고, 어느 날 우연히 바위 그늘 아래서 갈라테이아와 아키스가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목격하자 질투와 분노로 이성을 잃은 폴리페모스는 무시무시한 괴성을 질렀다.
그의 등장에 놀란 갈라테이아는 바다로 뛰어들어었으나 인간 아키스는 폴리페모스가 던진 거대한 바위에 깔려 죽고 말았다.
신들은 슬퍼하는 갈라테이아를 위해 아키스가 흘린 피를 맑은 강물로 바꾸게 되는데 그 강이 바로 '아치Aci 강'이다.
이 이아기로 인해서 시칠리아 동부 해안의 여러 마을 이름 앞에는 '아치Aci'가 붙게 되었다.



여기 바다의 파도가,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이 참 예쁘다.
이곳 바다에 솟아있는 거대한 암석들은 신화 속 거인 폴리페모스-또 폴리페모스-가 도망치는 오디세우스를 향해 던진 바위라고 한다.
중요한 사실, 폴리페모스는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원조거인 키클롭스 삼형제와는 다른 족속이다.
이 삼형제는 거대하고 기괴한 외모 때문에 우라누스에 의해 타르타로스에 갇히게 되지만 티타노마키아 때 제우스에 의해
세상으로 나온다. 이들은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에게 각기 벼락, 트리아이나-삼지창, 퀴네에-보이지않게되는 투구-를 만들어준다.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폴리페모스를 비롯한 키클롭스들은 포세이돈 후손으로, 외딴섬에 모여사는 야만적인 존재다.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신을 경외하지 않으며 동굴에 살면서 양을 키우는데, 지능이 낮고 잔인한 식인 괴물로 묘사된다.
가장 힘센 키클롭스인 폴리페모스는, 트로이아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를 동굴에 가두고 그의 부하들을 잡아먹다가,
오디세우스의 꾀에 속아 하나뿐인 눈이 멀게 되고 오디세우스가 탈출하는 배를 향해 분노의 바위들을 던진다.
아치 트레차 앞바다의 바위들이 폴리페모스가 오디세우스의 배를 향헤 던진 바위들이라 '키클롭스 바위들'로 불린다고 한다.



내일 오전 9시반에 카타니아를 출발하는 터키항공의 온라인체크인은 이미 한참 전에 시작되었다.
터키항공은 출발 24시간전부터 온라인체크인이 가능한데 우리가 구입한 이코노미석은 체크인시 죄석이 그냥 자동배정된다.
배정된 좌석을 변경하려면 추가요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남들 다하는 온라인체크인을 너무 늦게 하면 남은 좌석 중 배정될 터이니
자리가 서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기에 바닷가 벤치에 앉아 서둘러 앱 체크인을 했다.



마당에 자그마한 놀이터가 있는 건물 벽화의 주인공은 한 면은 폴리페모스이고 다른 한 면은 갈라테이아와 아키스다.
비극적인 신화가 깃든 아름다운 해안을 걷고 바다를 응시하면서 하늘을 보니 구름빛이 더 어두워지고 있다.
가물가물하고 어스푸레한 오전, 맑은 날엔 또렷이 보인다던 에트나 화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전 11시50분, 카타니아 구시가로 돌아가는, 승객 많은 434번 버스에 앉았다.
버스는 이곳에 올 때처럼 바닷길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고, 버스 왼쪽에서 보는 끝없는 해안은 기막히게 멋지다.



카타니아 구시가의 어느 계단을 올라 오후 1시, 대학가 레스토랑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
관광지에 세트 메뉴-현지인 동네엔 평일 점심메뉴 흔함. 도시마다 다름-가 있는 음식점이 흔하지 않은데, 이곳은 2코스 음식과 물을
최고의 가성비로 제공한다. 진열장 메뉴 중 메인 2가지와 사이드를 고르면 순서대로 데워서 가져다주는데, 든든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평일인 화요일 낮, 한적한 Via Etnea 에트네아 거리를 산책하듯 걷는다.
시라쿠사에서처럼 KIKO에 들렀고 어느 카페에 들어가서는 피스타치오크림빵과 미네 디 산타가타를 포장했다.



거리명처럼 Via Etnea에서는 환히 맑은 날에는 에트나 화산이 보인다던데, 간절했던 건 아니지만 살짝이 아쉽다.
행운에 마음 주지 말고 소망이나 욕심도 내보이지 말고 단순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


카페에서 포장해온 피스타치오크림빵과 미네 디 산타가타-아가타의 가슴-은 예상처럼 모두 달디 달다.
특히 미네 디 산타가타의 본질은 더도말고 덜도말고 완벽한 설탕 자체였다.
내일은 꼭두새벽에 카타니아 공항으로 가야하니 짐을 다 싸두었다.
시칠리아에서의 마지막 날, 생각이 많았던 걸까. 자정 넘어 겨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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