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적응하려면 1주일 넘게 시간이 필요한 나이, 또 4시반에 깼다
이른 새벽 눈뜬 김에, 인적 없기를 기대하며 밤낮없이 붐비는 빅토리아스트릿에 가보기로 했다.


오전 6시20분, 아무도 없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빅토리아스트릿에 사람들이 여럿 있다.
멈춰버린 클래식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거리, 눈에 담고 사진으로 담아도 어느 하나 제대로 담을 수 없는 경이로운 거리.
사암으로 지은 거대한 성벽 같은 건물들이 비탈과 곡선이 만든 거리와 조화롭게 어우러져 기막힌 감성과 낭만을 자아낸다.



숙소로 돌아가면서 샌즈버리마트에 부지런히 들러 우유와 토마토를 구입했고, 오전 8시에 식사를 한 후 9시반 숙소를 나섰다.
에든버러캐슬 남쪽에서 있는 숙소에서 캐슬 북쪽의 스코틀랜드 내셔널갤러리로 가려면 에든버러캐슬이 있는 언덕을 넘어야 한다.
에든버러캐슬로 가는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고 다시 그만큼의 경사로를 내려와서야 도착한 내셔널갤러리, 벌써 힘들다.



어제 국립박물관에 이어 스코틀랜드 내셔널갤러리에서도 아무런 보안 검사가 없으니 의아할 정도다.
이들 뮤지엄들은 무료입장이나 5파운드의 도네이션이 적극 요청되고 있어서 내부 곳곳에 현금박스와 카드단말기가 배치되어있다.
이제 미술관이 건네주는 즐거움과 그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질 시간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로코코 그리고 19세기후반 작품들이 모여있는 3층 전시실로 먼저 입장한다.
'잠자는 아기예수를 경배하는 성모'(1485)에서 무릎 꿇고 있는 성모마리아가 3/4 측면으로 보이는 이 구도는 보티첼리의 스승인
프라-수도사- 필리포 리피에게서 차용했으며, '두 천사와 함께한 예수의 탄생'(1495)을 그린 필리피노 리피는 보티첼리의 제자이자
천하의 난봉꾼 수도사 필리포 리피의 아들이다. 이 세 화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선과 구도, 색채와 인물 형태가 묘하게 닮았는데
난 보티첼리보다 이 두 부자의 그림을 더 좋아한다.
아기예수가 십자가 모양의 실 감는 도구를 바라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501)의 '실 감는 성모'는 역시나 미완성작이다.
재주와 재능이 넘쳤던 다빈치는 완성된 회화가 몇 점 없는데, 다방면의 업무로 인한 분주함과 완벽주의 성향도 이유가 될 수 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책임감의 부재도 그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또다른 대가, 라파엘로 회화의 아름다운 색감과 삼각 구도는 어디서든 눈길을 끈다.



그리고 이어서 베네치아화파 화가들의 그림이 선사하는기쁨이라니.
요절한 천재 조르조네는 '궁수'(1510)에서 남자의 아련한 초상을 양궁에 사용되는 엄지손가락 없는 장갑과 함께 섬세하게 묘사했고
티치아노는 '인간의 세 시대'(1514)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과 에로스, 서로를 열렬히 바라보는 젊은 연인, 두 해골을 응시하는
뒤쪽 노인 그리고 맨 뒤 구원의 약속을 상징하는 교회를 통해 삶과 사랑의 덧없음을 표현했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 틴토레토의 ' 무덤으로 옮겨지는 그리스도'(1565)는 17세기초에 가시관을 들고 있는 천사가 그려진
아치형 상단이 절단되어 도난당했고 그 때문에 위쪽엔 뜬금없이 천사의 발만 남아있다.
티치아노가 오랫동안 경계했던 틴토레토 곁엔 티치아노의 수제자 베로네세의 '비너스와 큐피드와 마르스'(1588)가 있다.



엘그레코는 '세상의 구원자'(1600)에서 이름처럼 오른손으론 축복을 내리고 왼손엔 천구를 든 살바토르 문디를 그려냈고
벨라스케스의 '달걀을 요리하는 노파'(1618)와 무리요의 '과일 바구니를 든 젊은 남자'(1665)는 인물 묘사가 예술이다.
무리요의 그림은 유럽 유명 미술관마다 한두 점 이상 항상 전시되어있고, 특히 무리요의 고향 세비야에 있는 '세비야미술관'의
초대형전시실 전체에 한가득 걸려있는데, 그가 그린 인물은 남녀 모두 천상계 인물처럼 아주 곱고 화사하다.
한편, 전시실 한가운데나 벽면 쪽에는 가끔 조각 작품도 있는데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도 있었다.



스코틀랜드 내셔널갤러리엔 예상보다 많은 명화들을 전시실을 채우고 있다.
푸생이 그린 '성 카타니아의 신비로운 결혼'(1629)은 성화의 인기 소재인 알렉산드리아의 성카타리나가 꾼 꿈을 형상화했고
루벤스는 '헤롯의 잔치'(1638)는 헤롯왕 안티파스의 생일날 헤로디아 딸 살로메를 통해 세례자 요한이 참수되는 에피소드를 다뤘다.



'침대에 누운 여인'(토비아스를 기다리는 사라.1647)속 모델은 렘브란트와 1643년부터 6년간 동거한 게르트예 디럭스로 추정된다.
그녀는 초상화를 위해 자세를 잡는 대신 침대에서 신랑 토비아스-토비아-가 악마를 쫓아내는 것을 지켜보는 성경 속 인물 사라처럼
포즈를 취했는데, 토비아는 그림 속에서 늘 대천사 라파엘과 같이 등장하며, 잡은 물고기의 간과 염통을 태워 사라를 괴롭히던 악마를
퇴치하고 쓸개즙으로는 눈먼 아버지 토빗의 시력을 되찾게 하는 인물-'토빗기' 에피소드-이다.



프란츠 할스는 하를렘의 시장인 '프랑수아 워터스'와 그의 두번째 아내 '수잔나 바일리'(1645)를, 그들의 결혼 기념으로 그렸고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1655)는 현존하는 베르메르 작품 36점 중 가장 초기작이자 가장 큰 작품 중 하나로,
성경을 주제로 그린 유일한 작품이라고 한다.
한편, 전시실엔 영국화가 윌리엄 터너(1775~1851)가 몇 점 보였으나 터너 그림은 테이트브리튼에 넘치도록 많으니 그때 살펴보려한다.


이제 인상주의 그림과 모더니즘 회화가 전시되어있는 4층이다.
티에폴로의 '모세의 발견'(1735)은 파라오의 딸이 갈대밭에서 갓난아기 모세를 구출하는 구약성경 이야기를 동화처럼 표현했으며,
카날레토는 '베네치아 리바델리 스키아보니 동쪽 전망'(1745)에서 리바 델리 스키아보니-슬라브족의 해안-를 묘사했는데
날개 달린 사자상이 있는 산마르코 기둥과 두칼레궁전 및 아름다운 바다를 기막히게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그려냈다.



인상주의 아닌 사실주의 화가-난 인상주의 회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님-라서 좋은 까미유 코로. 그는 '빌다브레:숲 입구'(1825)에서
파리 서쪽 빌다브레에 있는 집 근처 전원 풍경을, 풍성한 숲의 이파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그림자 드리운 숲의 초입을 통해 그려냈다.
그리고 등장하기 시작하는 인상주의 회화들.
까미유 피사로는 느리게 흐르는 마른 강에 비친 하늘의 반영을 ' 슈네비에르의 마른'(1865)을 통해 표현했고, 내가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인상주의 화가 알프레드 시슬레의 '몰시 댐'(1874)은 런던여행 중에 그린 템스강 풍경 연작 중 하나로, 왼쪽엔 목욕하는 사람들을 넣었다.



코로, 모네, 피사로, 반고흐, 시슬레의 그림들이 가득 걸려있는 전시실에 사람도 가득하다.
클로드 모네는 아내의 건강 회복을 위해 프랑스 북부 베뙤유에 머무르면서 13세기에 지은 '베뙤유 교회'(1878)의 인상을 그렸고,
빈센트 반고흐가 아를에서 그린 과수원 연작 중 하나인 '꽃핀 살구나무가 있는 과수원'(1888)은 심히 목가적이고 서정적이다.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는 바다에 매료되어 이 주제로 50여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파도(1869)'의 배경은 노르망디 에트르타이다.
이 그림에서 부서지기 직전 말려 올라가는 파도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일본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폴 세잔은 '큰 나무들'(1904)에서 바위와 초목을 소재로 하여 칠하지 않은 흰 캔버스 그대로 드러나도록 표현했으며,
상단의 얽혀있는 나뭇가지는 공간의 모호함을 형성하여 초기 큐비즘을 예견한 그림으로 볼 수 있다.
1883년,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정착한 세잔은 '생빅투아르산'(1895)에서처럼 이 산을 가장 즐겨 그렸다.


고흐, 드가, 고갱 등에 둘러싸인 멋스러운 그림은 존 싱어 사전트의 '로크나우의 애그뉴 부인'(1893)이다.
초상화의 주인공인 애그뉴부인은 당시 병에서 회복 중인 상태였으나, 그녀가 입을 드레스까지 직접 고른 사전트는
중국 비단 벽걸이의 아름다운 배경을 바탕으로 그녀를 자신감 넘치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


갤러리 2층에 걸려있는 19세기와 20세기 초중반의 영국 회화들 중 단숨에 시선을 끌어모은 압도적인 작품은
에든윈 랜드시어의 '글렌의 군주'(1851)로, 스코틀랜드 고원이 주는 자연의 장엄함과 강인하면서도 우수 어린 사슴을 표현했다.
아, 이 강아지 그림. 1919년, 제인 코완 스미스가 내셔널갤러리에 52,257파운드-현 200만파운드이상-를 기증하면서 내건 조건은
사랑하는 '칼럼'(1895)-댄디 딘몬트 테리어-의 초상화가 영구 전시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오늘도 햇살 맑은 날, 최고기온이 19도밖에 안되는데도 따뜻하고 포근하다.
거리엔 영어 쓰는 여행객과 중국인이 아주 많고, 현지인으로 보이는 인도계 사람-과거 식민지-이 특히 많다.
아침부터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미술관을 2시간반 넘게 관람했더니 고단하다.
오후 1시40분, 숙소로 돌아와 맛있는 비빔국수-한식 최고-를 먹으며 기운을 챙기고, 쿠키를 먹으며 '허수아비' 마지막 12화를
본 것까지는 딱 좋았으나 이후 무려 3시간 넘게 또 낮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시차 적응 안되고 체력은 소진되었으니 어제랑 같은 상황, 그런데 뭐 어떠리.
쫓아오는 여행도 아니고 따라가는 여행도 아닌데, 쉬엄쉬엄 몸이 시키는 대로 해도 괜찮다. 다 괜찮다.



오후 9시반, 어둠 깔린 바깥 세상으로 향한다.
불빛 켜진 그라스마켓을 지나고 성벽처럼 빛나는 빅토리아스트릿에 올랐다.
그림에 설레다가 시차에 들볶이다가 '허수아비'에 부대낀 하루.
이제 안온함이 필요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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