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반, 별안간 눈이 떠졌다. 바깥의 밝은 기운에 이끌려 커튼을 열어보니 지붕이 반투명하게 하얗다.
승용차를 움직일 걱정에 살펴본 도로는 약간 질퍽거릴 뿐 다행히 빙판은 아니다.
밥돌들은 아직 한밤중이고, 어제 꽤나 혹사한 다리는 여전히 뻐근하다. 정말 한해 한해가 다르다는 생각.
잠시 다시 눈을 붙인 뒤 내려간 식당엔 정갈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다.
커피, 핫초코, 요거트와 과일까지, 덤으로 부활절 달걀까지 깔끔하고 맛있다.
옆 테이블엔 두 가족이 함께 여행 온 듯 8-9명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다.
하지만 절대 떠들지 않는 그들.어느 나라 사람일까, 우리의 호기심이 발동한다.
독일어권도 동유럽쪽도 아니고, 생경한 언어와 흰 피부, 큰 키를 힌트 삼아 북유럽인이라 마음대로 결론을 내린다.
거리엔 맛소금 같은 눈이 내리고 있다.
숙소 앞에 세워진 승용차에 올라 목적지인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의 하우프트거리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하니,
독일 내에 하이델베르크가 3곳이나 있다고 안내된다.
이 중 어디지, 우편번호를 모르니 대략 거리로 예상해 맞혀보는 수밖에.
로텐부르크에서 160km 떨어진 하이델베르크가 우리가 원하는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이다.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도로 주변이 온통 하얗다.
예상치 않았기에 더 반갑지 않을 법한, 여행지에서의 봄눈도 그저 신나고 즐겁다.
하이델베르크에 가까워지면서 하얀 정경은 사라지고, 눈가에 잡히는 석회 짙은 네카강이 사연 서린 운하처럼 흐른다.
칼스 광장의 지하주차장에 차를 모셔두고, 하이델베르크 성을 오른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벽돌빛 성채로 가는, 길지 않은 오르막길에도 낙서들의 생명은 길기만 하다.
유난히 넘치도록 많은 부끄러운 한글.
그래, 이 경관이었지, 감동 받았던 사진 속의 그곳이.
네카 강과 카를테오도르 다리, 잿빛과 붉은 지붕 건물들의 웅장한 조화, 그리고 다리 저편 '철학자의 길'까지.
하이델베르크성은 14세기초부터 17세기까지 건립한 성으로, 이 지역 선제후들이 500년간 본성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 기간동안 수 차례에 걸쳐 파괴되고 증개축되었기에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하이델베르크 성채 중 프리드리히 궁전 지하엔 1751년에 제작된 22만리터 용량의 와인통이 있다.
와인통 주위에 설치된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 규모를 살펴보니, 믿을 수 없을만치 어마어마하다.
거대한 와인통 앞의 벽면엔 빨강머리 아저씨 인형이 부착되어 있는데, 티롤 출신인 그는 와인통 지킴이였다.
와인통에 대한 절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루에 15리터의 와인을 마셔댔던 그는 늘 취해 있었고, 그를 깨우려면
종을 쳐야 했다고 한다. 그를 깨우던 종까지도 옆에 나란히 붙어있고, 여행객들은 재미있다는 듯 마구 종을 쳐댄다.
프리드리히 옆 건물에 자리한 약제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니, 아폴론 아들인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와 그의 딸 휘게이아를 새긴 나무 조각상이 우릴 반긴다.
고대인들의 예지력과 의술을 상징하는 뱀의 형상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뿐 아니라 여러 제약 도구에도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
아까 성을 올라온 쪽이 아닌 다른 입구가 나온다.
아내를 위해 프리드리히 5세가 단 하루만에 세웠다는 엘리자베스 문도 함께.
엘리자베스 문을 통과하는 작은밥돌의 걸음이 무척이나 경쾌하다.
고풍스럽고 웅장한 하이델베르크 성을 뒤로하며 길을 내려선다.
하이델베르크 구시가 어디서든 보이는 장엄한 그 모습이 아직도 가슴에 선하다.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의 중심인 하우프트 거리는 양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다.
그 거리엔 1592년에 세워져 유일하게 전쟁의 화염을 피한 리터하우스도 있고, 독일 최초 대학인 하이델베르크 대학도 있다.
하이델베르크 인구 13만여명 중 3만여명이 대학생이라 하니, 그 전통과 인적 자원면에서 대학도시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학생 감옥은 미리 인지했던 홈페이지의 안내대로 문이 닫혀있다.
18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치외법권이었던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경범죄를 저지른 학생에게 경찰 대신 벌을 내렸는데,
죄에 따라 1-30일간 학생 감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내부엔 당시의 집기들과 갇혔던 학생들의 낙서가 그대로 보존되어있다고 하는데, 부활절 연휴엔 내내 열리지 않는 감옥.
독일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레스토랑에 셋이 마주 앉았다.
창 밖엔 지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이따금 눈발이 내려앉고 있었다.
< 2008. 3. 23.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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