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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서유럽 이야기

벨기에 3 : 겐트를 걷는 즐거움

브뤼헤 역으로 가는 버스는 조금 전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따라 천천히 달린다.

멀지 않은 곳에 운하가 보이는 거리도 지나고, 마르크트 광장 옆도 스치고, 낙엽 날리는 수도원 앞길도 살짝 비춰준다.

 

브뤼헤역에 도착하자마자 겐트 성피터스역으로 출발하는 열차 시각을 확인하니 출발까지 15분이나 남아있다.

때 화장실에 가겠다는 작은밥돌, 급했는지 기차 화장실을 이용하라는 내 말을 밀어낸다.

그런데, 화장실에 들어간지 10분이 흘러도 이 녀석이 나올 생각을 않는다.

이런 상황이라면 기차를 못 탈 가능성은 높았기에, 난 안절부절 남자 화장실 앞을 기웃거렸다.

바로 그순간 이글거리는 내 눈에 확 띈 세면대 앞의 작은밥돌, 여유까지 부리며 손을 씻고 있다.

 

뛰엇~! 플랫폼을 향해 셋이 전 속력으로 뛰면서도 잔소리를 해대는 나.

늦었어, 빨리 좀 나오지, 이번 기차 못 타면 30분이나 또 기다려야한다고, 해도 짧은데...

쫑알거리며 뛰는 우리 뒤에 스물대여섯 쯤 되는 동양여자가 우릴 보며 알듯말듯한 미소를 짓고 있다.

 

브뤼헤 역 벽화

겐트 성피터스 역에 도착했을 때, 우린 이미 1일 다리 근육을 다 소모했기에, 중심가까지는 트램으로 이동한다.

흐린 하늘 아래 트램은 도로를 굽이굽이 꺾으며 길고 긴 거리를 끌어낸다.

 

겐트

35만명이 사는 도시인 겐트는 브뤼헤의 확장판 같은 느낌이다.

벽돌 건물과 계단식 지붕의 건물이 많고 긴 운하는 더 크고 깊다. 공기도, 하늘도, 사람들 숨소리마저도 깊고 강렬하다.  

 

아까부터 불던 바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강해진다. 바람 속에서 만난 포세이돈.

트의 어느 지붕 위로 올라간 그의 손에 들린 삼지창이, 파도 아닌 바람을 만들어내고 있는건지.

금빛 삼지창이 흐린 대기를 품으며 빛을 낸다. 

 

가이드북에서 본 백작의 성에 다다랐다.

플랑드르 지방의 어느 백작이 12세기에 지은 이 성엔 목조 인쇄기, 직조기와 함께 중세 고문기구가 전시돼 있다는데,

관람 시간은 끝나지 않았지만 입장 시각엔 늦어버렸다.

10월이 되니 유럽의 성, 궁전, 박물관, 미술관 등의 관람시간이 당겨지고 있다.

백작의 성 앞 거미줄 조형물은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엔 그만이다. 대놓고 사진을 찍어달라는 작은밥돌~ 

 

트의 운하에도 브뤼헤처럼 보트가 머문다.

브뤼헤의 운하 보트를 타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겐트의 운하는 이미 저녁 어스름에 싸인 시각이다.

 

해가 진 후 다시 돌아온 겐트 성피터스역이 참 예쁘게 벨기에스럽다.

벽돌이 외부로 그대로 드러난 건물들은 영국 느낌이 나면서도 벨기에만의 개성이 잔잔히 드러난다.

역 근처 어디선가에서 날아오는 맛있는 향이 코끝과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겐트 성피터스역

브뤼셀에서 출발하던 아침과는 달리 겐트에서 브뤼셀로 돌아오는 저녁 기차 안엔 승객들이 가득하다.

내일이면 어떤 이는 낙엽을 밟으며 출근길을 걸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다음 여행을 위해 이웃나라로 향하겠지.

우리는 내일 아침 벨기에 다른 도시를 거쳐 저녁엔 우리가 안식하고 있는 빈의 우리집에 안착할 것이다.

 

브뤼셀 그랑플라스
브뤼셀 오줌싸개 동상

오늘 밤 오줌싸개 녀석은 어제와는 달리 옷을 입고 있지 않다. 가식이나 수식 없이 그녀석다운 원초적 모습이다.

여행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미지의 세상을 향해 작은 도전장을 들이밀며 순수하고 원초적인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날 밤, 녀석이 내놓는 가느다란 오줌 줄기 속엔 내 인생의 무지개도 있고 오로라도 있었다.  

 

< 2007, 10. 28.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