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갈 곳을 떠올리고 떠날 곳을 정한 다음엔, 여행에 관련한 이런저런 예약을 미리미리 챙겨하는 내게, 언젠가 작은밥돌이
걱정 어린 눈길로 내뱉었다. "목숨을 걸어요, 목숨을...."
이번에도 목숨의 반은 하늘에 걸어두고 3개월 전에 예약한- 못 가면 비행기값 홀라당 날아가니까-저비용 항공기를 탄다.
유럽에서 몇 년 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저비용항공은 예약이 빠를수록 가격이 상상할 수 없이 저렴하다.
그러나 이번 항공기 출발 시간이 깜깜한 새벽 6시 50분, 늦어도 4시 40분엔 공항으로 출발해야 했기에 출발 전날 취침 전,
휴대폰 알람을 맞춰놓은 것은 물론 집에 있는 자명종 시계도 머리맡에 총 출동시켜 두어야했다.
휴대폰 알람소리에 화틀짝 놀라 일어나니 새벽 2시40분이다.
우리의 아침 양식인 도시락을 챙기고 마무리 짐을 꾸리고 나니 4시가 넘어있다. 자, 이젠 밥돌들도 일어나야지.
새벽 공항은 설레는 얼굴들이 제법 많다. 누군가의 말처럼 여행의 설렘이 최고조에 달하는 곳은 공항임에 틀림없다.
수속을 마치고 탑승구 앞에 앉아 노곤한 몸으로 김밥을 집어들었다.
몸 상태로 봐선 여행을 떠나는 건지 귀가하는 비행기를 타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 첫새벽부터 뭐하는 건지.
기내에서 한숨도 못 자고 8시반에 도착한 브뤼셀 공항의 규모는 인천공항 못지 않다.
인구 1,000만 정도의 나라에 이 큰 공항이라니, EU본부가 있어서 그런가.
그런데, 출구가 어디냐고.비행기 안에서 푹 잔 밥돌들이 좀 찾아보셔.
가도가도 끝없는, 멀고도 먼 출구를 나와 공항 지하 1층에 있는 기차역으로 움직였다.
공항역에서 중앙역까지 가는 기차 안, 검표원에게 티켓을 내밀자 표가 두 장밖에 없느냐며 작은밥돌의 나이를 묻는다.
만11세. 여권을 요구한 검표원은 '곧 12살이 되는군요'라며 인사를 날리고 지나간다.
벨기에에선 만 12세미만 어린이는 기차요금 무료다.
25분후 도착한 브뤼셀 중앙역은 보수공사 중인지 시큼시큼한 천장엔 철근과 전선들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와있다.
작은 나라 벨기에. 그러나, 중앙역사의 정문 위쪽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이렇게 두 언어가 나란히 쓰여 있다.
수도 브뤼셀에선 두 언어가 다 쓰이고, 북부지역에선 네덜란드어가, 남부에선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까 기차 안의 전광판과 방송도 두 언어였던 것 같다.
.
중앙역에서 멀지 않은 그랑플라스- 프랑스어로 '큰광장'이란 뜻-를 찾아야 했다.
인포센터에서 지도를 받아야 했고, 예약한 호텔을 찾는 기준점이기도 했으니까.
아, 여기 정말정말 예쁘다. 빅토르 위고가 이 광장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 격찬을 했다지.
시청사와 왕의 집, 길드하우스들로 폭 싸여있는 광장이 정말 아름답다.
시청사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나온, 또 결혼식을 올리려 청사 안으로 들어가는 신랑 신부의 모습도 곱다.
그랑플라스에서 가까운, 금세 찾은 호텔에선 너무 이른 시각이라 체크인이 불가하다 했다.
가방만 맡기고 체크인 시각을 재확인한 후 다시 거리로 나왔다.
유럽 3대 실망 중 하나라는 브뤼셀 오줌싸개 동상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바짝 다가가보려는데 국적을 알 수 없는 남자들이 그 앞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한 무리가 지난 후 바라본 작은 녀석. 신장 60cm에, 동상에 얽힌 유래 역시 다양한데, 오늘은 옷을 입고 있네.
현재 동상은 1619년에 제작된 것으로, 이 까무잡잡한 소년은 가장 나이 많은 브뤼셀 시민이다.
녀석 옆에 와플 가게가 있다. 벨기에에서 꼭 먹어야 하는 다섯 가지 중 하나인 와플. 맛은 있지만 꽤 비싸다.
호텔에서 발길을 대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랑플라스가 나와버린다.
광장 한가운데 누구나 눈을 대는 그곳에, 아련히 흐린 하늘 아래서도 꽃과 그림은 화사하게 빛나고 있다.
그랑팔라스를 지나 갤러리 로얄생튀베르엔 그윽한 가을 오전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쇼핑몰이라 해야 할까. 수수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상점들이 저마다 개성을 드러내며 안팎의 공기를 가른다.
조금 더 걸어 성미셸 성당이다.
열심히 쏘다녀 이미 반 녹초가 된 팔다리, 작은밥돌은 성당 앞 벤치에서 머물겠단다.
전형적인 고딕 양식답게 내부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다. 성당에서 바라본 브뤼셀 구시가 역시 환하다.
체크인을 위해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귀여운 만화 벽화들~
인포에서 받은 만화 벽화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거리를 뒤질 땐 나타나지 않더니, 작은밥돌이 다 찾아낸다.
틴틴과 스머프를 탄생시킨 나라가 바로 벨기에다.
다시 돌아온 호텔.
짐을 맡긴 후 3시간 넘게 더이상 몸을 가누지 못하게 돌아다녔건만, 아직 체크인 시간이 안 되어 객실에 못 들어간다고 한다.
호텔 한켠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데, 옆 소파의 어느 여인은 휴대폰을 들고 30분 넘게 떠들어댄다.
오늘 우리는 새벽 기상과 오전 산책이 분명히 힘들었다.
그런데, 카드키를 받아 객실로 올라왔을 때 고단하고 몽롱한 기운에서 확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트리플룸을 예약했는데, 왜 더블이냐고 침대 하나는 어디 있냐고.
프론트에 문의해서 얻은 해답, 보이지 않던 침대 하나는 가구 속에 숨어있었다.
컵라면을 먹고 지친 몸을 그저 마구 던졌었나 보다. 낮잠에 인색한 나도 잠깐 눈을 붙였으니.
여행지에서 낮잠을 잔 건 작년 여름 로마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남들은 오후에 쏘다니며 보는 것을 미리 오전에 몰아다니고는 완전히 나가 떨어지셨다.
두 밥돌은 정신 놓은지 이미 오래다. 이제 일어나야지, 기상~ 하루 두 번 기상을 외친다.
하루가 간다. 해가 지고 있다.
호텔을 나와 오후 늦게 또 눈에 든 그랑플라스, 여러 번 마주친 덕분에 이젠 많이 친해졌다.
'벨기에'에서 먹어야 할 다섯 가지는 '와플, 초콜렛, 홍합, 감자튀김, 맥주'라고 한다.
특히 이 작은 나라에 맥주 양조장이 600곳에 이르며 그 자부심도 대단하다고 한다.
음식점들이 가득한 부셰르 거리의 'Chez Leon'에서 홍합 요리와 맥주를 주문했다.
그런데, 먼저 바게트 빵과 버터가 나오자, 작은밥돌이 갑자기 종업원에게 질문한다 .이거 공짜인가요.
물론이지 하며 응대하는 종업원이 유쾌한 표정으로 엄청나게 긴 바게트를 작은밥돌에게 주자, 사양하는 울녀석.
고풍스럽고 잔잔한 벨기에. 브뤼셀의 가을 밤이 조금씩 지고 있다.
< 2007. 10. 27. 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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