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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빈에서 부친 편지

겨울비

이른 아침 안개를 걷어올리고 나니, 하루종일 겨울비가 내린다.

11월 추위 덕에 미리부터 올겨울을 경외시했는데, 요즈음 며칠은 친절할 정도로 포근하다.

 

비바람 방향을 제대로 견적 못한 작은밥돌의 우산은 아침부터 뒤집혀버리고,

바쁜 등교길을 되돌아와 아파트 처마 아래서 우산 살을 매만지고 있으려니

적지 않은 비임에도 초연하게 온몸을 적시는 젊은 남자 하나가 지나간다.

 

우산을 바로하고 지하철로 향하는 도중에 만나는 많은 사람들 역시 우산없이 걷고 있다.

비를 피하려는 마음은 물론, 몸을 덜 젖게 하려 애쓰는 몸짓도 찾아보기 어렵다.

비는 내리고 있고 내리니까 맞을 뿐이다. 비켜가려 하지 않는다.

 

점심 시간. VIS 한국 학부모 모임이 있었다.

친한 분과 함께 그 자리에 갔고,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반갑다.

우리나라에서는 늘 그 건너편 위치에 있었기에, 한번도 학부모 모임엘 끼어본 적이 없었다.

익숙지 않았던 분위기도 시간이 가면서 따스해졌다.

다양한 어조의 모국어를 실컷 들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기쁘다.

 

오후 4시. 오후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어둡다.

이맘 때 우리나라 6-7시의 어둠이다.

 

저녁. 여전히 든든한 양의 비가 흩뿌리는데, 유난히 해물파전과 동동주가 그립다.

그리운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마법이라도 일어나면 좋으련만.

 

내가 가당찮은 동동주 타령을 하는 동안,

기호는 곁에서 도톰한 손을 끊임없이 움직여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나 같으면 용돈을 지갑 통째로 집어줘도 안 할 일인데,

몇 시간이고 지치지도 않고 열중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 사이, 열린 창문 틈으로 젖은 도로를 타고 귀가하는 자동차들 소리가 점점 커진다.

바람따라 출렁이는 집집의 노란 불빛엔 행복의 온기가 걸려 있다.

 

빈 오페라하우스
뮤직페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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