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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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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추억 오래된 일기장에 그대가 있습니다. 손 끝 떨림도, 가슴 일던 바람도 한 가지 이유였지요. 어깨를 마주하고 걸으며 멀리 같은 곳을 보았습니다. 시간이 우리를 놓을 때까지 함께 걸어가리라는 마음은 드러내지 않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우리를 놓아버리기 전에 지난 흔적은 멀리 앞서버렸습니다. 가라앉는 마음을 건져 올리며 그제야 느낍니다. 그대가 내게 준 별들을. 바스라지지 않는 기억들을.
가지 않은 길 가지 않은 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면,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면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
달 낮바다에 달빛이 떨어진다. 달이 보이지 않아도 그 빛은 물결로 피어 올라 내 눈에 걸터 선다. 저리고 저린 꽃같은 그리움의 모서리를 안고 달빛은 나의 낮바다를 떠 다닌다.
마중 마중 행여 그대 오려는 날 분홍빛 치장하고 붉은 마음 단장하고 집 앞 의자에 앉아 그대를 기다리네 빛살이 내리고 사람들은 문을 닫아걸어도 그대 흔적은 옷깃조차 없네 난 그 여린 의자에서 혼잣소리를 묻힐 듯 숨 뱉어내도 그대 소리는 발끝조차 없네
비 이 하늘 아래에도 비가 내린다. 그리움 크기만큼 모퉁이를 적신다. 나무 내음 짙던 그곳 놓인 잔에 흐르던 너의 사랑 창문 위를 걷던 비는 개울이 되고 바다가 되어 내 깊다란 숨을 적셨다. 비는 아직도 내린다. 여물어만가는 그리움을 들고 길다랗게 내 창을 적신다.
이유 이유 우리가 그때 거기서 왜 만났을까 그런 우연이 아니었으면 젖지도 주리지도 않았을 것을 그저 뒤를 스치는 이름 없는 숨결이었다면 에는 마음 자락 매달리지 않았을 것을 마주 서지 않았더라면 어두운 늪에 침잠하지 않았을 것을 그렇게 우린 만나지 않았어야 할 것을
지각 지각 그런 때가 있었다. 누구도 모르게 누군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거칠게 헤매다 흰 몸짓을 드러내고 흰 웃음을 드러냈다. 그 몸짓에 그 웃음에 내 속 물기는 넘쳐 흘렀다. 마르지 않은 채 쌓여만 갔다. 뒤척인 가슴은 엉클어져 등 뒤로 숨었다. 그러는 사이 흰 몸짓이 떠나고 흰 웃음이 바스라지고 되돌아온 그 터 그 터에 있던 꽃문은 이제 없다. 꽃은 시들어 말랐고 녹이 난 문은 땅 속에 묻었다. 기다리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다 지나버렸다. 다 늦어버렸다.
숲 빛을 가르고 모르는 땅 아래 묻어둔 어느 줄기가 바람 타고 올라와 다 익은 이파리를 갉아놓는다. 난 또 심장을 놓은 채 머리를 헤쳐 풀고 이제는 지나버린 숲을 또 나신으로 더듬는다. 아무도 없는 숲에선 울어도 울어도 잊어도 잊어도 흔적은 그치지 않는다. 그가 만든 숲 그늘엔 찾아도 찾아도 작은 나신 가릴 줄기 하나 없다. 아파도 아파도 달래줄 이 하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