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유

(94)
창 그 때 그 안에 네가 있었지 불편한 평화와 소통없는 어휘와 낯선 그을음 앞에서 너는 꾹꾹 손금을 눌러접었다 네 슬픔만한 하루, 내 사랑만한 이틀... 시간이 가르쳐 준 건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자국들 기지개를 열고, 창을 열어도 남아 숨쉬는 건 애타는 눈길 쓰다듬던 내 사랑만치의 서러움
삶이라는 것도 언제나 타동사는 아닐 것이다. 가끔 이렇게 걸음을 멈추고 자동사로 흘러가게도 해주어야 하는 걸 게다. 어쩌면 사랑, 어쩌면 변혁도 그러하겠지. 거리를 두고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아야만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삶이든 사랑이든 혹은 변혁이든 한번 시작되어진 것은 가끔 우리를 버려두고 제 길을 홀로 가고 싶어하기도 하니까. - 공지영, '길' 에서- 갑작스레, 지난 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우연히 들른 그곳의 빛깔은 우리네 삶 같았다. 화려함과 그 뒤안길의 쓰라린 공존.
어느 날 어느 날 꽃을 던지고 싶었다 너를 태우고 싶었다 난 잠들고 싶었다.
미련 둘 미련 둘 여름 들길을 걷고 흰 바다를 유영하고 물든 산등성이 굽이쳐 다니다가 겨울 으스름달에 묻어 네가 왔다 애절한 네 고개는 어지런 꿈처럼 가누지 못하고 처연한 네 눈빛은 나의 빈 자리로만 흐르는데 쉼 없이 돌아섰던 네가 손 내밀면 난 다시 그 시린 손을 잡아야 할까 이미 조각난 심장 그러나 네 손 잡던 나를 놓아버리던 그 날처럼 너의 손길을 오려낼 수 있을까
가시 가시 손 끝에 파도가 인다. 뾰족한 생떼 같은 무심한 것이 깊숙이 들어 온몸이 해진다.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휘청이는 사이 네가 지켜야 할 슬픔을. 고작 가시도 아픈데, 네 가슴의 심연은 어떠하였으리. 미안하다 미안하다.
겨울은 겨울은 바람이 깊다 마른 나무 이파리가 깊다 하늘 닫는 끝빛이 깊다 길 위 시간이 깊어간다 지나는 이들의 눈빛이 깊어간다 서 있는 이의 저미는 추억이 깊어간다 덧없는 내 애상이 깊어만 간다 이젠 찾고픈 꿈길이 퍼붓는 눈발만큼이나 깊어만 깊어만 간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것 세상에서 가장 느린 것 미워하는 사람 좋아지는 데 걸리는 시간, 사랑하는 연인이 타고 오는 전철, 군에 간 남자 친구 기다리는 하루하루, 엘리베이터 문 닫히기 기다리는 3초, 주문한 음식 기다리는 시간, 수학 시간에 돌아가는 시계 바늘, 월급날, 용서하는 시간, 달팽이, 나 자신을 아는 데 걸리는 시간 - '좋은 생각'에서- 나를 알아내기도, 너를 알아버리기도, 그리고 용서하기도 너무 느려서 너무나 느려서 그건 영영 이루어지지 못하는 게 아닐까.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사랑과 미움이 저리게 만나는 아픈 길목 아무 까닭도 없이 때론 누군가 내 여린 발목을 걸고 지쳐 굽어진 등을 누르고 고단한 영혼을 휘젓는다 산다는 것은 견디어내는 것 이길 자도 이겨낼 자만도 그 아무 것도 없는데 견디어내라는 마음겹고 쓰라린 주문만 끝없이 되풀이 되는 것 산다는 것은 그러나 살아지는 것 그리고 살고 싶은 것 내가 만드는 찬란한 진주와 그것이 선사한 환희와 그 안에서 찾아낸 파랑꽃 피동에서 영롱한 능동이 되는 것 산다는 것은 그래도 사랑하는 것 눈물 자국보다 허약한 미소가 소망일 수 밖에 없음을 누군가 뜨겁게 찾아주기를 바라는 것 산다는 것은 어스레히 어스레히 알아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