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새벽이랑 친구가 돼버렸다. 평소엔 끙끙거리는 아침 기상이지만, 여행 떠나는 날은 무조건 예외다.
점심 도시락과 음료, 컵라면과 과일에 다른 간식까지 챙기고 꾸리다보니 2시간이 그냥 지나가는데, 난 언제쯤 김밥,
유부초밥 이런 것 안 싸들고 우아하게 떠나보려나. 날이 좀 흐릴지도 모른다는 예보가 있었으나 아침 날씨만은 정말 좋다.
슬로바키아 쪽으로 차를 달려 한산한 국경을 넘어 주유소에 차를 세웠다.
기름을 넣은 뒤, 고속도로 통행권을 구입하러 주유소샵으로 들어가는 큰밥돌을 쫄랑쫄랑 따라갔는데, 샵에서 마주치는
슬로바키아 처자들의 자태가 하나같이 곱다. 오스트리아보다 물가가 싸다며 얼른 초코바 하나를 집는 작은밥돌.
한참을 달리다보니 고속도로가 끊기고, 기아자동차의 공장이 있는 '질리나'부터는 국도만 이어진다.
국도변 여기저기엔 수박 장수들이 좌판에 수박을 늘어놓고 있다.
어느 새 12시가 지나있다.
슬로바키아에서 폴란드로 가는 도중 눈에 띈 작은 주차장에 차를 멈췄다. 오, 저기 테이블도 있고, 위쪽엔 가게도 있네.
가게에 들어가니 살림집도 함께 있는 듯 개인 화장실인데도 흔쾌히 사용 허가를 내준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초콜렛과 음료수를 구입하는데, 주인 할아버지가 일본 사람이냐고 묻는다.
아니라 했더니, 한국인이냐고 되묻고는 남한인가 북한인가까지 꼼꼼히 따져 묻는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햇살이 굉장히 지글거리고 있다.
드디어 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어 폴란드에 들었다.
많이 칙칙했던 슬로바키아보다 폴란드는 좀 환하고 트인 느낌이다.
그런데 그 맑던 날씨가 흐려지고 있고, 차를 오래 탄 탓인지 작은밥돌도 몸살 기운을 호소한다. 아프면 안 되는데...
국경에서 크라코프까지도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이쪽으론 고속도로가 없어 국도로만 달리다보니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고, 크라코프 시내에 들어서서는
도로 체계가 서울이나 비엔나와는 또 달라서 호텔을 찾아 시내를 몇 바퀴나 뱅글뱅글 돌아야 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보니 3시가 넘어있다. 대체 차 속에서 몇 시간이나 있었던 거지.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일단 컵라면으로 불굴의 의지를 다시 세운 후, 방을 빠져나왔다.
아차차, 그런데 환전은 어쩐담.
호텔에서 구시가까진 트램으로 6정거장이고, 트램을 타기 위해선 환전을 해서 승차권을 구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호텔에선 환전이 불가능했고 호텔 근처에도 환전할 곳도, 승차권 판매소도 없었다. 이러한 경우 방법은 둘.
복잡한 구시가까지 차를 끌고 가거나 트램에 무임승차 하는 방법밖에 없다. 과연 우리의 선택은 후자였다.
적발되면 벌금 낼 각오를 하고, 과감히 트램에 올랐다. 작은밥돌은 걱정을 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한번만 더 했다가는 명줄이 짧아질 것만 같은 긴장의 시간이다.
작은밥돌에겐,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걸 설명했지만, 아찔한 시간이 되어버렸다.
트램에서 바라본 크라코프는 그리 밝은 모습은 아니다.
거리엔 간판들이 튀어나올 듯 어지럽고 건물들 역시 긁히고 찌든 자국이 선명하다.
중세 폴란드 왕이 거처했던 바벨성 앞에서 트램을 내렸다.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폴란드 수도였던 크라코프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사령부가 있어서 파괴를 면해서,
당시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바벨성 내부는 입장 시각이 지났기에 정원을 가로질러 비스와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낮은 성벽 쪽으로 걸어갔다.
근데 참말로 심각한 지경이다. 저것을 어찌 강이라 말할쏘냐. 딱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개울 폭이구만.
역시 강 자체로만 보면 한강을 따라갈 강이 없다. 늘 조경이 최대 난제이긴 하지만.
바벨성을 나와 본격적으로 크라코프 구시가로 움직이자 멀지 않은 곳에 즐거운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결혼 야외 촬영을 하러 성 안으로 들어가는 참인가보다.
신부도 아리땁고 신부 친구인듯 붉은 드레스를 입은 처자도 아름답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인 듯한 조각상들을 열지어 있는 구시가 입구의 어느 성당 앞에 멈췄다.
시큼시큼한 조각상들을 쳐다보느라 얼이 빠져있는데, 건너편에선 한 무리의 여경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다.
무슨 일이 생겼나. 경찰 복장이 뭐 저래 하며 멍하니 쳐다보니 경찰 복장을 여자가 지나가는 남자를 과감히 붙잡는다.
그러더니 윗옷을 들추고는 맨살에 무언가를 뿌리더니 그 냄새를 맡고는 스스로 황홀한 미소를 짓는다.
아하, 맨투맨식 향수 광고구나.
근데, 향수가 아닌, 사람의 자존감을 팔아먹는 것 같다. 선진국에선 하지 않는 행태.
중앙 광장은 조성될 당시인 13세기엔 유럽에서 가장 넓은 광장이었고, 지금은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 이어 두번째 크기다.
넓기도 넓지만 모여있는 사람도 진짜 많다. 주말에 이어 월요일까지 유럽 연휴라, 온 유럽 사람들이 몽땅 몰려든 것 같다.
저기, 아까 그리도 애타게 그리워하던 환전소가 있다. 환전을 하고 돌아 나오는데 다시 우릴 부르는 폴란드 남자.
일본이랑 하는 축구 경기 중계를 텔레비전에서 해주고 있으니 들어와 잠깐 보란다. 우리 한국인이어요...
역시 13세기에 지어진 긴 직물 회관과 성모 마리아 성당은 구시가 광장에서 단박에 띄는 건축물이다.
직물회관 1층엔 토산품을 파는 가게들이 들어차 있고, 폴란드 특산품인 호박 장신구가 많이 보인다.
직물회관 앞의 폴란드 시인 '미츠키' 동상엔 장난꾸러기 녀석들이 어찌나 오르내리며 노는지 시인의 수난이 말씀이 아니시다.
성모마리아 성당엔 미사가 한창이고, 단체 여행을 온 듯한 중년의 한국여인들도 성당 뒤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광장의 작은 노점에서 나무 단검을 하나 챙긴 작은밥돌이 다시 아프단다. 그래, 오늘은 이쯤에서 들어가자.
매표소에서 호텔로 돌아갈 트램 승차권을 사려 하니 어린이용만 있고 어른 것은 없다고 한다.
근처의 다른 매표소를 문의하니, 젊고 잘 생긴 매표소 남자가 친절하고 자세하게도 안내를 해 준다.
바벨 성 앞을, 맥주 인간(?)이 걸어가며 손을 흔든다.
낡은 트램을 타고 돌아온 호텔 침대엔 이마에 물수건을 얹은 작은밥돌이 누워있다.
종일 차를 타고 크라코프로 온 시간보다 더 힘겨운 밤이 이어지고 있다.
< 2007. 5. 26. 토 >
'탐사('04~08) > 동유럽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폴란드 3 : 잔학의 끝, 아우슈비츠 (0) | 2007.06.08 |
---|---|
폴란드 2 : 소금이 만든 미궁, 비엘리츠카 (0) | 2007.06.04 |
헝가리 : 부다페스트와 함께한 토요일 (0) | 2007.05.03 |
체코 : 체코의 겨울 선물 (0) | 2007.02.08 |
크로아티아 4 : 트리에스테 너머 (0) | 2006.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