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탐사('04~08)/동유럽 이야기

폴란드 3 : 잔학의 끝, 아우슈비츠

도로에 내리붓는 햇살이 여름의 그것 못지 않다.

비엘리츠카에서 다시 크라코프를 거쳐 서쪽으로 60여Km를 더 가야만 이를 수 있는 곳.

나치에 의해 이름마저도 '아우슈비츠'라 바뀌어버렸던 오시비엥침이다.  

 

이번 여행 계획을 짜면서 처음엔 아우슈비츠를 포함하지 않았었다.

오스트리아에 남아있는 마우타우젠 강제수용소의 기억이 아직 너무도 또렷했기에,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고통과 회한의

역사를 되풀이하여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고 그 기억을 재생시켜 마우타우젠과 아우슈비츠를 비교 대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영화 '피아니스트'가 떠올랐다.

살아남기 위해 낮추고 숙이고 땅 속까지 꺼지던 주인공 '스필만'이 떠올랐다. 아우슈비츠엘 가야 했다

 

서쪽으로 아무리 가도 오시비엥침이란 이정표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출현한 고속도로.

책자나 지도상엔 국도 이동편만 권유하고 있었기에 길을 잘못 든 것이 분명한 듯했다.

일단 고속도로- 폴란드는 구간별 요금 징수 체계-로 들어가 톨게이트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멀지 않은 곳에 

오시비엥침으로 빠지는 나들목이 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시골길을 한없이 달린다.

작고 낡은 마을들을 수없이 지나며 때묻지 않은 자연과 친해질 즈음, 부여잡고 있던 둑이 터지듯 가슴이 덜컹하며,

붉은 벽돌로 이뤄진 공간이 나타났다. 1940년에 세워진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정문에는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 노동은 자유를 만든다.)라는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다. 

초기엔 정치범, 소련군 포로, 집시 등을 수용했던 이곳이, 유럽 최대 유태인 학살 장소가 된 것은 1942년부터라고 한다.

 

수용소에 끌려온 그들은, 지니고 있는 물건을 모두 빼앗긴 채 굶주림과 전염병, 강제노역, 고문, 생체 실험 등으로 죽어갔다.

28개동에 이르는 붉은색 수용소 건물 안팎엔 가장 기본적인 인권조차 지니지 못했던 그들의 아픈 영혼이 맴돌고 있는 듯했다.

 

멀지 않은 곳에 카톨릭 사제와 신도들이 보인다.

몇몇은 벌써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고 있다. 간이 가진 잔인함의 끝은 어디인가.

'총살의 벽'이라 명명되었던 죽음의 벽 앞에 놓인 꽃 몇 송이로 그들의 비극이 위안 받을 수 있을까.

저 공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듯 가슴이 아리어 미어지는데...

 

수용소 내부를 들여다보던 작은밥돌이, 속이 아프다고 한다.

상태가 좋지 않은 소화기관을 붙잡고 여기까지 왔는데, 감당하기 쉽지 않은 사진이나 집기, 시설을 보더니 견디기 힘들어한다.

두 남자를 그자리에 남겨두고, 나홀로 철책을 넘어 수용소 밖의 가스실로 걸음을 옮긴다.

가스실 앞엔 한 무리 젊은이들이 슬픔을 짓고 있고, 어두운 가스실 한쪽의 소각로에는 영혼을 다독이는 듯 노란 꽃을 놓여있다.

 

이제 크라코프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철길이 남아있는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엘 가봐야 할까. 

오시비엥침에서 3km 떨어진 브제진카에 자리한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는 53만평의 땅에 300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67개동과 많은 굴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유와 권리를 짓밟았던 감시 망루와 이중의 철조망과 음험한

기운은 감춰지지 않는다.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

그냥 보고만 있어도 오감이 뚝 멈춰버리는 느낌. 

멀리서부터 달려오던 철길은 거대한 수용소 안 저끝까지 애닯게 이어지고 있는데,

생각에 잠겨 선로 위를 걷던 한 남자가 갑작스레 철길 밖으로 튕겨나간다.

 

현실과 과거와 영화를 오가다 하늘을 보았다.

아우슈비츠를 걷는 내내 '피아니스트' 속 쇼팽의 '녹턴'이 귓가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 2007. 5. 27.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