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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서유럽 이야기

영국 5 : 휴일, 또 휴일

어제 아침엔 찾지 못했던 버스승차권 자동발매기의 위치를 드디어 발견했다.

지하철보다는 버스가 체질에 맞다는 결론을 내린 후라 주저없이 승차권 일일권 2장을 발권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나그네가 흥얼거리며 한 마디. 오늘은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네. 엥, 버스 안 다니는 날이 어딨어, 참~

그런데, 버스승차권 발권에 성공한 순간, 또다시 지나가는 과객의 친절한 말씀.

오늘은 크리스마스라 버스와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단다. 갑자기 머리가 후끈후끈해진다.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엔 도로에서 버스를 못 본 것 같다.

버스 도착 시각을 알려주는 정류장 부스의 작은 전광판을 보니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다.

그럼 지하철 역으로 가보자구.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한 지하철 역은 출입구가 셔터로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그 안 안내판에 버스와 지하철, 기차의 운행이 오늘(12월25일)은 완전히 중단된다고 적혀있을 뿐.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거지, 대중교통이 완전히 올스톱이라니.

오늘의 예정지였던 옥스퍼드는 이미 물 건너 가버렸는데 우리의 7파운드는 어찌되는 것인지.

이 난국을 헤쳐나갈 방법은 둘. 하나는 런던에 사는 큰밥돌의 업무상 지인의 도움을 기대하는 방법.

그렇지만 오늘은 성탄절, 가족끼리 오붓한 하루를 지내고 있을 터인데,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남은 하나의 방법인 내일 아침에 둘러보려 했던 호텔 주변 코스를 일단 오늘로 당겨 다니는 수밖에.  

 

하이드파크
앨버트 기념비
앨버트 홀

다행히 호텔 코 앞에 하이드파크와 몇몇 볼거리가 있긴 하지만 하루의 여정을 공중 분해 시켜버린 런던의 성탄절.

하이드파크엔 우리의 성탄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참담하게 인생을 마친 다이애너비의 발걸음이 남아있다.

그녀의 발자국이 지나간 곳에 새겨진 금빛 자취가 더할 수 없이 애처롭다. 

 

흐리고 스산한 겨울의 하이드 파크는 끝없이 넓다. 나무도, 잔디도 푸른빛을 숨긴 채 본연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하이드파크 끝에서 뿌연 시선 당기는 것은 빅토리아 여왕이 부군 앨버트공을 애도하여 세운 앨버트기념비와 앨버트홀.

100년 더 된 건축물들에 가없는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까. 그윽한 멋이 드러난다. 

 

자연사 박물관

하이드 파크와 앨버트 홀을 지나니 대학 건물들이 줄을 선다.

이건 음악대학, 저건 미술대학, 또 저기 과학대학. 어, 저건 그 유명한 런던의 자연사 박물관이네.

작은밥돌의 지대한 관심 덕에 여러차례 들여다봤던 빈 자연사박물관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

갖가지 벽돌들이 주는 고풍스러움엔 런던의 작은 역사가 숨을 쉰다 

 

작은밥돌이 입이 나올 만도 했다.

하이드파크를 가로지르기 시작하여 2시간을 쉼없이 걸었으니 다리가 아플 만도 하겠지.

거리엔 간혹 관광버스만이 우리 시야에 잡힐 뿐, 덩치 큰 운송 수단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

백성의 원성이 자자해질 땐 일단 철수하는 게 상책이다. 호텔로 철수할 유일한 길은 택시다.

 

택시라는 소리를 입 밖에 내자마자 얼른 손을 흔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세우는 작은밥돌.

이럴 땐 정말 급행+특급 동작이다. 자다 일어난 듯 부스스한 기사 아저씨.

행선지를 알려주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늘 기차 운행에 대하여 물으니 단호하게 '노'란다.

달랑 5분여만에 도착한 호텔까지의 요금은 자그만치 10.40파운드.

 

택시에서 내려 호텔로 오는 거리의 빨간 전화부스가 오늘따라 더 선명하다. 

깨끗하게 단장한 어느 집 현관문도 오늘따라 더 짙게 검다.

 

일단 아주 잠시만 쉬자. 뭐 별다른 방법이 없다.

참으로, 정말로 요상한 일이라는 생각만 들 뿐. 이 요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잠시 후 위를 채우러 간다.

원래 저녁 예정이었던, 영국 전통음식인 피시앤칩스로스트비프를 점심에 결행가기로 했던 것.

패딩턴 역 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다보니 겨우 괜찮아보이는 레스토랑이 하나 보인다.

벽을 온통 1960-1970년대 배우들의 흑백사진으로 치장한 이곳이 꽤 독특하다.

 

피시앤칩스
로스트비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스러운 마음이 또 발동한다.

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들여다본 근처의 패딩턴 기차역은 적막 그 자체다.

공항 가는 기차만 운행된다는 내용만 전광판에 오락가락인데, 기차는 내일까지 운행을 쉰다는 내용이 그아래 덧붙여있다. 

 

인도에서 횡단보도 시작하는 지점의 'Look right'가 재미있다.

서울에서, 또 비엔나에서의 습관대로 런던에서도 늘 왼쪽을 봐가며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한다.

 

습관이란 또 잠재적 고정관념이란 얼마나 뼛속까지 깊은 것인가.

절대 있을 수 없으리란 아니, 그런 생각조차 용인하지 않았던 대중교통 운행 완전 휴무.

그러고보니 어디서 들고 왔는지 모르는 작은 팜플렛엔 25일 교통 휴무가 안내되어 있다.

하루이틀 미리 알았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새로운 바퀴살을 잡는 여행은 즐겁다. 그것조차 여행이 주는 삶의 한 모서리니까.

 

 

< 2006. 12. 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