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를 떠난 우리는 알함브라 속으로 들어올 때처럼 미니버스에 올랐다.
버스에서 내려 누에바 광장을 지나 숙소에 들어섰을 땐 이미 2시도 훨씬 지난 시각이었고 이른 아침부터 강행군을 한 우리는
라면을 끓여 뱃속을 채운 뒤 바로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집에서건 여행지에서건 낮잠에 인색한 작은밥돌과 나는 거실 소파에 길게 앉아 TV를 향했고, 낮잠대마왕 큰밥돌은
침실에서 안락하고 달콤한 낮잠에 빠졌다.
특히 큰밥돌은 알함브라에서, 회사에 문제가 생겼다는 전화를 받았던 터라 피곤한 몸과 곤두선 신경을 함께 달래야 했다.
스페인 평일 낮 TV도 일본 만화가 점령해 있다. 작은밥돌은 스페인어가 더빙된 '도라에몽'을 보며 깔깔거리고, 나는 죄다 스페인어로만
쓰인 탁자 위 그라나다 안내서를 뒤적이며 어제 저녁에 중국 마트에서 사온 맥주 캔 하나를 따고 있었다.
그라나다 건물의 창 안쪽엔 커튼 대신 나무로 된 덧문이 달려있는데, 볕을 차단해 실내온도를 낮추는 역할을 할 뿐 방음과는 전혀 무관했다. 구시가의 낮과 밤은 늘 소란하다.
침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오른쪽을 보면 섬세하고 웅장한 그라나다 대성당이 보인다.
유럽 어느 도시에서나 흔한 성당이지만 그라나다 대성당의 바랜 갈색 외관은 도시 곳곳에 남겨진 이슬람 정취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서너 시간 동안 꽤나 긴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숙소를 나섰다.
시설의 불편함이나 소음 문제가 있긴 해도 이 아파트의 장점이 바로 이것.
구시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어서 시시때때로 들어와 쉴 수 있다는 것이다.
저녁 7시인데도 햇살이 짱짱하다. 한여름엔 10시나 돼야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한낮이나 다름없는 시각이다.
우선 어제부터 찜해두었던 제과점에 들러 맛있어보이는 빵을 샀다.
그 빵집의 문 여는 시각이, 다음날 아침 우리가 말라가를 향할 시각보다 늦은 9시였기에 다음날의 간식거리를 미리 챙긴 것이다.
그리곤 기념품 가게에 들러 어딜 가나 빼놓으면 안 되는 기념품을 산 뒤 누에바 광장 북쪽의 하천 쪽을 향했다.
좁은 도로 사이로 현대적이지 않고 세련되지 않은, 소박하고 그라나다스러운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도 주위를 살펴가며 천천히 움직인다.
오른쪽 위편으론 알함브라 궁전 일부가 보이고, 넓지 않은 하천이 흐르는 이곳에 하천을 따라 긴 광장이 형성되어 있다.
그 광장엔 어김없이 야외 레스토랑들이 펼쳐져 있음은 물론이다.
야외 레스토랑에 앉아 서너 가지 타파스와 맥주를 주문했다.
저기 앞에선 한 악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클라리넷을 멋들어지게 연주한다.
맛있는 음식에, 맥주에 게다가 음악까지. 여기가 파라다이스야.
우리를 신나고 즐겁게 해 준 악사 아저씨에게 감사의 마마음을 담아 흔쾌히 감상료를 지불했다.
짜지도 않고 맛있는 올리브 맛에 반해서 올리브를 추가로 더 달라고 했더니 종업원의 안색이 살짝 변한다.
왜 그러지, 공짜도 아니고 다 유료면서 표정이 왜 그랬대.
다른 음식과 오징어 튀김은 정말 맛있는데, 엔초비는 역시 우리 입맛엔 한참 무리다.
10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아까 보았던 안뜰 있는 저택에선 독특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어서 끊기지 않고 쏟아지는 박수 소리.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보니 중정 무대에선 기타소리와 어우러진 포르투갈 여가수의 노래가 애절하다.
아, 맞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란 유명한 포르투갈 여가수가 있었는데 딱 그 분위기였다.
하루를 마무리해주는 이 아름답고 가슴 저린 음악이라니.
행운 넘치는, 덥지 않은 그라나다의 여름밤. 길가 불빛마다 자그마한 행복이 쏟아진다.
< 2008. 6. 24. 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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