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드리드를 떠나 그라나다로 가는 날.
9시에 호텔 체크아웃 후 그제 들렀던 슈퍼마켓엘 갔으나, 9시반에 문을 연다는 안내판만 붙어있을 뿐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다.
이후에도 겪게 되지만 스페인 상점들은, 아침 일찍 열고 저녁 일찍 닫는 오스트리아의 아침형 슈퍼와는 다른 저녁형 상점이었다.
결국 슈퍼 한 코너에서 직접 굽는, 싸고 맛있는 빵은 포기한 채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르니 그때가 마침 출근 시간인 듯 승객들이 꽤나 많다.
캐리어를 끌고 버스 뒤편으로 가려는데, 버스기사가 캐리어를 끌지 말고 들고 가라는 손짓을 하며 타박을 한다.
캐리어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데 들고 가냐고요. 들고 다닐 거면 캐리어를 왜 가지고 다니냐고요...
호텔 처음 올 때 탔던 버스기사는 무지하게 친절했구만, 버스 바닥 문제 생길까봐 캐리어 들라는 기사는 처음 본다.
버스 터미널이 있는 지하철 역에 내려 사방을 둘러보니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스페인어와 몸짓을 섞어 차근차근 알려주었으나 잘 모르겠다.
아주머니의 손가락이 가리키던 쪽을 향하니 버스 터미널이 맞는 것 같다.
그때 뒤에서 한국말로 애타게 부르며 나타난 어린 한국 여인네 둘, 우리와 같은 곳을 찾고 있단다.
인터넷으로 예약한 티켓을 가지고 승차한 버스는 예정 시각을 약간 넘겨 출발했다.
버스엔 여러 또래가 뒤섞인, 부모의 배웅을 받으며 탄 아이들이 20명이 넘게 타고 있었다.
마드리드를 벗어나 달리는 차창 밖으로 황토색 일색의 아파트가 보이고 언덕과 산에 올리브 나무가 줄지어 심어져 있다.
버스가 달리니 괜히 이것저것 먹고 싶은 걸, 삶은 계란-아침에 재빨리 삶은-과 과자를 나눠먹은 후 여행의 참맛에 빠지려는 순간,
바로 뒷자리의 스페인 여자아이 셋이 0.1초도 쉬지 않고 큰소리로 떠들어 댄다.
버스 타고 처음 20-30분은 워밍업 시간이라 조용했구만.
1시간을 참다참다 조금 조용히 해달라 말했지만 그말도 전혀 못 알아듣고 보란듯이 엄청나게 계속 떠든다.
하는수없이 인솔교사를 수소문해서 큰밥돌이 상황을 자세히 얘기했지만, 영어는 거의 안 통하고 눈치로 알아챈 그 남자,
뭐 그런 것쯤 가지고 그러느냐, 떠드는 건 개인의 자유 아니냐는 표정이다.
아이들은 동양인의 시선이나 항의쯤은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또 분방하게 지껄이고 있다.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난 미쳐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후에 아이들을 향해 화를 냈으나 유효시간은 딱 3초였다.
결국 내가 내뱉은 말은 어른스럽지 못하게도 '난 스페인이 싫어, 너희들 때문에' 였다.
물론 전혀 못 알아듣고 쭉 자유분방이다. 작은밥돌만 옆에서 킬킬거리며 웃는다.
휴게소에 들렀다가 다시 출발한 버스 안에서도 그 세 녀석들만의 거친 수다는 끝이 없다. 정말 돌아버릴 뻔했다.
3시 40분, 드디어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마드리드보다 덥긴 하지만 이젠 이 고통스런 소음에서 진짜로 완벽 해방이다.
예약한 APT 주인에게 큰밥돌이 전화를 거니 누에바 광장에서 만나자고 한다.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을 하나 지나쳐, 다시 누에바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도착한 아담한 광장엔 여주인과 예닐곱 살된 예쁜 딸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그라나다 아파트렌탈 사이트에서 본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하고 작은 아파트의 내부 설명이 끝나고 여주인이 돌아간 후,
우린 이른 저녁을 끓여먹고 거리로 나왔다. 구시가 딱 중심에 위치한 아파트의 위치는 정말 끝내준다.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러 그라나다 지도를 구한 후,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숙소 옆에 자리한 누에바 광장에도 다시 들르고, 오가다 만나는 크고 작은 광장과도 기쁜 눈인사를 한다.
그라나다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위치한 인구 30만 명의 도시다.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곳으로, 거리 곳곳에서 이슬람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여느 유럽 국가에선 쉽사리 볼 수 없는 독특한 대성당 외관과도 즐거운 인사를 나눈다.
오스트리아보다 해가 천천히 뜨는 대신 지는 해도 무척이나 늦다.
또 누에바 광장이다. 야외카페에서 타파스 두세 가지를 놓고 시원한 맥주를 마신다.
계산해 달라는 큰밥돌 말에 계산서도 없이 가격만 외치는 웨이터. 스페인 사람들 특성이 셈이 정확하지 못하거나 바가지거나.
더운 날씨에도 운동화를 신고 온 큰밥돌의 발을 위해 아라비아풍이 나는 상점에서 아라비아 분위기의 슬리퍼를 구입했다.
해가 지면 종적을 감추는 서유럽인들과는 달리 안달루시아의 밤은 대낮 같다.
수없이 오간 골목의 타파스 바에선 현란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2008. 6. 23.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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