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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남유럽 이야기

스페인 6 :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2

나사리 궁을 나와 알카사바로 향했다.

역시나 알카사바 입구에서도 직원이 바코드 인식기를 티켓에 들이댄다.

웅대한 알카사바는 로마시대 성채 자리에,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무어인-북아프리카 이슬람인-이 9세기에 건축한 것으로,

지금은 그 자취만 남아있다. 

 

알카사바

나사리 궁에서처럼 알카사바에서도 옛 이슬람인의 주거지인 알바이신 지구가 보인다.

미로 같은 좁은 길의 연속인 알바이신 지구는 알함브라 궁전을 조망하기에, 특히 알함브라 야경을 즐기기엔 가장 이상적인 지역이라

하는데 직접 체험하고 싶은 의욕은 절대 고취되지 않아서 멀리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알카사바에서 본 알바이신

알카사바를 벗어난 우리는 카를로스 5세 궁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9세기에 지어진 알카사바가 알함브라 궁전 내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이라면, 카를로스 5세 궁전은 스페인이 주권을 되찾은 이후인

1526년부터 축조된 건축물이다. 근데, 어디 있지.

알함브라에 들어오면서 나사리 궁 입장시각에 쫓겨 궁전 배치도를 챙기지 않았더니, 알함브라 지도라고는 여행 책자에 있는 것

달랑 하나 뿐인데 상세하지 않은 지도라 이럴 땐 소용이 없다.

 

두어번 그 앞을 오가다 드디어 발견한 카를로스 5세 궁전. 에고, 여긴 아까 나사리 궁에 가면서 지났던 곳이잖아.

18세기에 완성된 카를로스 5세 궁전은 정사각형 건물로 중정이 배치되어 있다.

이 중정엔 무대와 객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매년 여름 그라나다 국제 음악제가 열린다고 한다.

손때 묻은 듯한, 바랜 듯한 중정을 둘러싼 기둥들의 빛깔이 아스라하다.

 

카를로스 5세 궁전

카를로스 5세 궁전 1층엔 알함브라 관련 물품을 전시하고 있는 알함브라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공사 중인 나사리 궁 '사자의 중정'의 12마리 사자 중 한 마리가 좀더 큰 다른 사자와 함께 이곳에 있다.

오호, 원래 네 입이 고운 물줄기를 뿜어낸단 말이지~

 

사자의 중정에 있어야 할 12마리 사자 중 하나
카를로스 5세 궁전 앞

폼페이만큼이나 쉬지 않고 발품을 팔아야 하는 곳이 알함브라 궁전이긴 하지만, 이 시각쯤 되니 발바닥부터 허리까지 말짱한 곳이 없다.

드디어 마지막 임무, 아리따운 헤네랄리페 정원이 우릴 기다린다.

 

벌써 헤네랄리페 정원인가 하는데, 알고보니 궁전 곳곳에 가꾸어진 아름답고 싱싱한 뜰이다.

정원을 향해 가는 길이 삼림욕장 같다. 피톤치드가 여기저기 날아다닌다.

 

헤네랄리페 정원

헤네랄리페는 14세기 초, 나사리 왕조의 왕자를 위한 여름 별장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나사리 왕궁과 알카사바 쪽이 아닌 '태양의 언덕'이라 불리는 조망 좋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당시에 여러 개의 정원이 조성되었으나

지금은 단 하나만 남아있다.

 

헤네랄리페에서 본 알카사바

세상이 온통 나무와 꽃과 물 뿐이다.

이렇게 싱그럽고 맑고 상쾌할 수가 없다. 어느 하나 예쁘지 않고 어느 하나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자리가 없다.

헤네랄리페의 최고 정원은 '수로'라는 뜻을 지닌 아세키아 중정으로, 물의 궁전답게 천국의 정원답게 분수의 물줄기가 주위 경관과

어우러져서 풍요롭고 멋진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세키아 중정
아세키아 중정

보고만 있어도 평화롭고 흐뭇하고 안온해진다.

자연이 주는, 나무와 꽃과 물이 선사하는 새삼스러운 즐거움에 한참을 빠져있어 본다.

 

헤네랄리페

이제 헤네랄리페의 마지막 관문인 '물의 계단'이 대기 중. 신나는 하이라이트다.

계단 좌우 손잡이를 타고 내려오는, 긴 물줄기가 시원하고 재미나기만 하다. 어떻게 이런 기막힌 발상을 했을까.

계단과 계단 사이엔 중정처럼 작은 분수가 솟고, 양 옆 푸르른 나무들은 정취를 더해준다.

밥돌들은 카메라를 들고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나를 향해 물을 뿌려대며 또 서로에게 물 세례를 주며 깔깔거린다.

    

물의 계단
물의 계단

길게 뻗은 예쁜 아치형 문들을 제치며 출구를 향했다.

긴 문을 빠져나갔을 즈음, 한 동양 여자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쭈그려 앉아있다.

언뜻 보아 중국인인듯 한데 지나던 백인남자가 물을 권하자 정중히 사양한다. 큰밥돌이 혹시나하여 물어보니 한국인이다.

무더운 날씨라 탈수증이나 열사병이 염려되어 안색을 살폈지만, 뒤에 일행이 있다며 우리가 내민 얼음물도 손을 내젓는다.

아하, 그거야 그거, 배 아픈 거라구. 분명해,  배탈이야.

 

벌써 1시반, 알함브라 궁전에서 5시간 가량 머문 셈이다. 과거로 가는 아름답고 기쁜 시간 여행을 했다.

출구를 나오며 뒤돌아본 알함브라는 대롱 매달린 분홍꽃과 천상의 조화를 만들고 있었다.

 

 

< 2008. 6. 24.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