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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남유럽 이야기

스페인 5 :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1

아침 해가 일어나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노곤한 내 눈을 띄운 범인은 밤새 아니 늦은 새벽까지 이어지던 음악 소리였다.

3층에 위치한 아파트 1층엔 bar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늦은 밤부터 시작된 음악은 새벽 6시가 돼서야 끝을 보았던 것이다.

물론 그라나다 아파트 렌탈 사이트에선 우리가 머문 아파트의 소음에 대해 명시하고 있었지만, 아파트 위치가 위치인 만큼,

또 스페인의 밤문화가 긴 만큼, 주변 소음에 대한 시끄러움이라 생각했을 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고 해서 일찍부터 서둘러야 할 스케줄을 미룰 순 없었다.

수십 번 예약을 시도하다 실패한 -알함브라 사이트와 스페인 기차 사이트, 정말 징그럽게 예약이 안 된다- 알함브라 궁전으로

아침 일찍 가야 했던 것이다. 전날 밤에 미리 준비해둔 아침을 간단히 챙겨먹고 밖으로 나왔다. 

 

알함브라행 미니버스

서늘하고 맑은 아침 7시. 

알함브라행 버스 정류장을 찾고 있는데, 그라나다 호텔 직원이라는 백인남자가 버스 번호와 함께 승차 위치를 친절히 알려준다.

알함브라행 미니버스엔 우리 말고는 두 사람만이 타고 있을 뿐이고, 작은 버스는 알함브라를 향해 경사진 길을 힘차게 오른다.

 

 

종점에서 내려 알함브라 입구 쪽이라 여겨지는 곳으로 향한다.

웅장한 아치형 문으로 살랑살랑 가볍게 부는 바람이 상쾌하기만 하다. 앗, 근데, 매표소가 여기가 아닌가벼.

다시 제대로 찾은 매표소 앞엔 30여 명만이 줄을 서 있다.

성수기인데도 생각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적으니 정말 다행이다.

 

매표소 오픈 시간인 8시까진 30분만 기다리면 된다. 뭐, 그쯤이야~

간이 흐를수록 우리 뒤로 줄은 점점 길어지고 8시를 훨씬 넘겨서야 티켓 판매가 시작되었다.

 

"우리 작은밥돌은 만 12살이라고요!"

두 번이나 큰소리로 외쳤지만, 어른요금과 동일하단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공통점은 관광대국이라는 것과 그에 걸맞지 않게 어린이와 학생 할인요금에 엄청나게 인색하다는 것인데,

그 특징은 알함브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게다가 느려터진 티켓팅 과정을 기다려서 받은 나사리 궁전의 입장 시각까진 20분도 남아있지 않았다.

 

알함브라 궁전 입구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슬람 교도들의 지배를 받았던 이베리아 반도.

그 이슬람 세력의 최후 거점이었던 그라나다에 이슬람 문명의 결정체인 알함브라 궁전이 세워진 것은 13-14세기에 걸쳐서였는데,

1492년 스페인에 함락된 이슬람 나사리 왕조 최후의 왕 부부는 알함브라 궁전을 떠나 북아프리카로 도망가면서 알함브라 궁전이

보이는 언덕에서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알함브라는 아라비아어로 '붉은 성'이란 뜻인데 이는 성곽 축조에 사용된 석벽이 철 성분으로 인해 붉은 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이슬람 예술의 호화로움을 보여주는 나사리 왕궁 성채인 알카사바, 16세기에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

그리고 이슬람 정원의 아리따움 자체인 헤네랄리페 정원, 이렇게 4지역으로 나뉜다.

 

카를로스 5세 궁전 앞

알함브라 궁전 전체의 입장엔 오전, 오후의 제한만 있지만, 그중 나사리 왕궁 30분 간격으로 입장시각두어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티켓에 명시된 입장시각이 아니면 나사리 궁 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는 것.

 

뛰어야 해. 일분 일초가 급할 땐 미리 준비한 정보조차 들춰보지 않게 된다.

알함브라 궁전 입구에서 티켓을 보이니 직원이 바코드 인식기를 티켓에 들이대더니 빨리 가란다.

카를로스 5세 궁 앞을 지나니 나사리 궁으로 들어가는 꽤 긴 줄이 보인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나사리 궁

나사리 궁으로 들어서니 석회 외벽 전체에 섬세하게 세공된 아라베스크 문양이 시선을 압도한다.

세상에나, 하나하나 직접 손으로 이걸 다 새겨 만들었다고.

 

나사리궁-메수아르 안뜰

나사리 궁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공간은 왕의 집무실인 메수아르 방으로, 궁에서 현존하는 곳 중 가장 오래된 공간이라 한다.

메수아르 방 앞엔 이슬람식 회랑과 안뜰이 자리해 있다. 엇, 오렌지 나무도 있네~

 

나사리궁-아라야네스의 안뜰

알함브라 궁전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가장 많이 알려져 익숙한 아라야네스 안뜰.

34.4m * 7,15m 크기의 연못 양 옆을 아라야네스가 장식하고 있다.

하늘엔 이름 모를 새가 향연을 펼치고, 연못엔 이슬람식 아치 기둥이 그대로 비춰지고 있다.

 

나사리궁-사자의 중정

사자의 중정은 왕 이외 남자들은 출입이 불가했던 왕의 사적 공간이었다고 한다.

124개의 가느다란 대리석 기둥과 정밀하게 석회 세공된 벽면이 매우 화려하고 호화롭다.

중앙엔 있는 사자의 샘은 12마리 사자가 받치고 있는 원형 분수로, 1시엔 1마리, 2시엔 2마리의 사자 입에서 물줄기가 뿜어나와

물시계 역할을 한다. 그런데, 공사 중이라 모든 사자들의 행방은 불명.

 

나사리궁-두 자매의 방

둥근 천장의 모카라베-종유석 모양의 장식-가 아름다운 두 자매의 방.

방의 세밀한 아치형 창으로 린다라하의 발코니가 보이고 발코니에선 옛 이슬람인의 거주지인 알바이신 지구가 한눈에 담긴다.

이젠 다리가 아픈지 엉덩이 댈 의자만 있으면 앉고 보는 작은밥돌.

정신없이 또 집중해서 여기저기 살피다 보니 나사리 궁에 들어온 지 한 시간도 더 지났다. 

 

두 자매의 방과 발코니
나사리 궁에서 바라본 알바이신

벽면마다, 기둥마다, 난간마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섬세함이 맺힌다.

나사리 궁을 나와 하늘을 보니 궁에 들어가던 때처럼 하늘은 여전히 맑고도 파랗다.

 

 

포도주의 문

나사리 궁과 알카사바의 경계인 포도주의 문엔 '오직 한 분, 알라만이 승리자다'란 문장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어디에 붙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제 우린 거대하고 붉은 성채, 알카사바로 간다.

 

 

< 2008. 6. 24.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