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며칠 동안 쨍하게 내리쬐던 햇살엔 미동도 않던 내 마음이, 뿌옇게 흐린 오늘 같은 하늘 아래에선 염치없는 반응을 드러낸다.
어휴, 또 잿빛이군, 정말 으이그, 요즘 이런 식이다.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 겨울 해도 얄밉고, 나를 남의 나라까지 밀고와 밥순이로 추락시킨 큰밥돌(남편)도 얄밉다.
요 며칠, 우유 쏟고 준비물 빼 먹고, 정신력 해이의 정석을 보여주는 작은밥돌마저 얄밉다.
몇 해 전, 10년이나 써온 가계부 10권을 쓰레기더미에 쏟아부은 일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썼던 일기를 결혼 후엔 가계부가 대신했기에 그것은 애환과 희망이 담겨있는 나의, 아니 우리들의 역사였다.
그 소중한 역사를 던져버린 이유는 남편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미움 때문이었다.
결혼 후에도 계속된 직장 생활. 맞벌이 부부임에도 가사와 육아에서 남편은 당사자가 아니었다.
조금 일찍 퇴근하는 날과 주말에만 약간의 협조자가 되어줄 뿐이었다.
남편의 협조적이지 못한 태도는 시간의 문제라고 애써 위로했지만, 예전부터 지닌 남자로서의 기득권을 놓고 싶지 않던
마음의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난 지내온 세월들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가끔 그때 기억이 떠오르면 미움과 고통은 곱절이 돼버린다. 마음 다스리기 요망됨.
그렇게 감정이 엉킨 채 책장을 들추고 있던 오늘 아침, 반가운 전화가 왔다. 아는 언니의 쇼핑 제안이다.
쇼핑몰 상점에서 즐거운 재미난 눈요기를 하고 점심식사를 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실컷 다리를 풀고 말도 풀고 나니,
신기하게도 마음마저 풀어지는 느낌이다.
사실 미움이 솔솔 풍겨나왔을 뿐 싫은 감정이 튀어나온 건 아니거든.
지금 큰밥돌도 긍정적으로 변화하려고 노력하기에 그전처럼 미운 건 아닐 수도.
단지 건조한 오스트리아의 겨울 때문에 필요 이상 민감해진 것일 뿐일 수도.
그래서, 나에게 묻는다.
나는
누군가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 아끼고 사랑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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