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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삶과 사랑 사이

살마키스 이야기

          < 헤르마프로디토스를 유혹하는 살마키스 - 빈 미술사박물관 >

 

열다섯 살의 그.

제우스의 아들이자 천상의 심부름꾼인 헤르메스와 애욕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헤르마프로디토스자신이 살던 이다 산을 떠나 낯선 세상으로 향한다.

 

어느 날, 호수에 멈추어 있는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보게 된 요정 살마키스.

여느 요정과는 달리 뜀박질에도, 사냥에도 관심 없는 살마키스의 즐거움은 자신을 치장하는 것.

그날도 살마키스는 수면을 거울 삼아 빗질을 하며 호숫가에 피어있는 꽃을 꺾고 있었다.

바로 그때, 상아빛 몸을 호수에 담그고 있는 아리따운 한 소년이 살마키스의 숨을 가로막는다.

살마키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불 같은 열정을 느끼며 사랑을 고백하고 그를 찬미하지만,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살마키스를 거부한다.

어쩔수없다는 듯 헤르마프로디토스를 포기하는척하던 살마키스는 순식간에 그를 끌어안으며 미친듯 기원한다.

'신들이시여, 이대로 있게 하소서. 영원히 함께 하게 하소서.'

 

얼마 후, 호수에서 나온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더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살마키스의 몸과 합쳐져, 건장하지 않은 몸뚱아리를 지닌 남녀추니(양성공유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절망에 빠진 그는 신들을 부른다.

'아버지 신이시여, 어머니 신이시여. 이 호수에 뛰어드는 자는 남녀추니로 나오게 하시고,

이 호숫물에 몸이 닿는 자는 살과 힘을 잃게 하소서.'

신들은 두 팔 벌린 그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았다.

 

빈 미술사 박물관의 한쪽에 있는 이 그림을 작년엔 왜 그냥 지나쳐버렸을까요.

작년 여름의 후텁지근한 습도 때문에 마음과 눈이 밀린 것이었다면 그건 핑계겠지요.

그리스신화 속 살마키스는 순간적인 열정과 욕망에 사로잡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열정도, 욕망도 이루지 못한 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맙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 이것도 진짜 사랑일까요.

순간의 이끌림에 가슴을 앓는 것, 진정 사랑일까요.

겉모습을 통해 조금은 내면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의 내면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외양만으로도 진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걸까요.

원치 않은 육체를 가지게 된 헤르마프로디토스보다

일시적인 욕망을 사랑으로 처절하게 오해한 살마키스의 눈빛이 더 가련합니다.

진짜 사랑이 그리운 가을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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