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밥돌 말에 따르면, 또 절실히 경험한 바에 의하면, 유럽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 연휴엔 무언가를 '관람하기' 위한 여행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다. 런던의 많은 박물관도 이때는 모조리 휴관이고, 뮤지컬 공연도 모두 하지 않았으니까.
진짜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영국박물관의 그리스로마관을 한 바퀴 휘이 돌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을 어찌 표현할까.
허겁지겁 그리고 잠시 스쳐 지났을 뿐인 영국박물관 속 그리스 신화를 만나야겠다.
뤼키아에 출몰한 괴물 키마이라는 머리는 사자와 산양을 합친 것과 비슷했고 꼬리는 용을 닮았다.
이 괴물은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기에 왕은 이를 퇴치할 용사를 구했다.
그러나 키마이라가 뿜어대는 불길 때문에 용사들은 키마이라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타 죽었다.
그때 뤼키아 왕 앞에 나타난 영웅 벨레로폰.
아내와 벨레로폰 사이를 의심한 뤼키아 왕의 사위가 뤼키아 왕에게 벨레로폰을 죽여달라는 편지와 함께 그를 보낸 것이다.
벨레로폰은 뤼키아 왕으로부터 키마이라를 없애라는 주문을 받고,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황금 고삐를 얻어 천마 페가소스를
지휘하여 키마이라를 물리친다. 그리고는 뤼키아 공주와 왕좌까지 차지한 벨레로폰.
오만은 극에 달해 올림포스 천궁까지 넘보던 그는, 제우스가 비장한 마음으로 보낸 등에가 페가소스의 피를 빨아먹자
천마의 잔등에서 떨어져 추락하고 만다. 오만은 방심을 부르고 비극을 예고한다.
네레이드는 그리스 신화 속 많은 바다의 신을 통칭한 것이라 한다.
'네레이드 제전'이라 불리는 이오니아 양식의 이 유적은 바다의 미풍을 네레이드의 섬세한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
바다와 바다의 신. 사실 그게 그거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만들어낸 상상력의 소산일 뿐.
아테나 여신은 지혜와 정의로운 전쟁의 여신이다.
미의 경쟁에선 아프로디테에게 아깝게 졌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은 아프로디테를 능가한다.
아테나 여신의 도시인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위 파르테논 신전. 어처구니 없게도 파르테논이 다 이 박물관 실내에 있다.
갖가지 신화가 부서진 채로 남의 땅을 떠돌고 있다.
반인반마 켄타로우스도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제자를 대하고 있다. 그럼, 아테네 파르테논에 가면 무엇이 남아있을까.
무엇이든 제자리에 있어야 제 아름다움의 빛을 낼 수 있다. 기둥만 남은 파르테논도, 조각과 부조를 몽땅 집어와 꾸며놓은
전시실도, 반쪽도 안 되는 역사가 돼 버리고 말았다.
이 여인네, 아니 여신. 좋아하지만 닮고 싶지는 않은 아프로디테. 미와 사랑의 여신이며 애욕의 여신이다.
못 생긴 남편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두고, 전쟁의 신 아레스와도 오랜 연인이었다.
천상의 재주꾼 헤르메스와의 사이에 헤르마프로디토스와 에로스 두 아들까지 두었으며 그녀의 장난질로, 부도덕한 상황
끝에 몰약나무로 변한 스뮈르나에게서 태어난 아도니스까지 연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광범위한 애정 행각의 당사자.
바다 거품 속에서 태어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그래서 사랑은 거품 같은 것이다.
아프로디테를 능가하는 애욕의, 아니 바람둥이 신 제우스.
제우스 스스로 백조로 변해 레다에게 접근하고 레다는 두 개의 알을 낳는다.
하나의 알에서는 디오스쿠로이(제우스의 아들들)라 불리는 쌍둥이 형제 카사토르와 폴리데우케스가 태어나는데,
이들은 나중에 신의 예우를 받으며 하늘의 별자리인 쌍둥이 자리가 된다.
다른 한 알에서 클리타임네스트라와 함께 나온, 아프로디테에 의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공인된 헬레네는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사랑에 빠져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되고 만다.
땅 위의 짐승 중 네 발로도 걷고 두 발로도 걷고 세 발로도 걷는 것은.
테바이에 나타난 괴물 스핑크스는 산길의 신전 기둥에 앉아 지나는 남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
테바이의 라이오스 왕은 스핑크스를 없앨 방법을 찾고자 델포이에 가던 도중 괴한에게 죽임을 당한 상황이었고,
스핑크스를 없애는 자에겐 테바이의 왕좌와 왕비가 상으로 걸려 있었다.
성장한 후, 자신이 받은 신탁을 경계하여 자신의 나라를 떠나 우연히 테바이에 온 오이디푸스.
그는 이 수수께끼를 명쾌하게 풀어내어 테바이의 왕이 되고 스핑크스는 스스로 머리를 찧어죽는다.
그러면 오이디푸스가 받은 신탁이란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짝을 이룬다는 해괴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델포이의 신탁이 잘못된 것인가. 물론 그럴 리 없다.
원래, 오이디푸스는 테바이 라이오스 왕의 아들로, 태어나기 전부터 이 괴이한 신탁을 받았다.
그래서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은 양치기에게 명해 오이디푸스를 버리게 했지만, 살아남아 이웃나라 왕자로 자랐다.
오이디푸스는 당연히 자기가 자란 나라를 조국으로 알고 양부모를 친부모로 여겨, 해괴한 신탁을 피하기 위해
조국을 떠났지만 진짜 조국은 바로 테바이였던 것이다.
라이오스 왕(아버지)을 죽인 자도, 라이오스 왕비(어머니)와 짝이 된 자도 오이디푸스였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어 세상을 떠돌다 생을 마쳤다고 한다.
신탁이 만든 운명은 너무나 잔혹하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은 없다고 믿는다.
아니,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은 없다.
테세우스는 어머니 나라인 트로이젠 왕궁의 섬돌 아래서, 아버지 아테나이의 왕 아이게우스가 숨겨둔 신표인 칼과 가죽신을
찾아내어 아테나로 향한다. 그는 영웅답게, 흉포한 도적들을 물리치고, 자신을 독살하려는 아테나이 왕비(계모)의 계략에도
휘말리지 않으며 아이게우스 왕의 왕자로 당당히 인정 받는다.
그리고는 크레타에 미노타우로스의 제물로 바쳐지는 젊은남녀 틈에 섞여들어가, 그에게 첫눈에 반한 크레타 공주 아리아드네의
기막힌 도움으로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다. 그러나 아리아드네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함께 크레타를 떠나왔지만, 아리아드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섬인 낙소스섬에 낙오되고 만다.
사랑, 거품만도 못한 허망함이여.
이 아름다운 보물 포틀랜드병에는 인간와 결혼한 유일한 신, 테티스 여신이 고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제우스가 테티스 여신을 넘보지 않았을 리 없었지만, '아버지를 능가하는 아들을 낳을 것'이란 테티스에 대한 신탁 때문에,
인간 펠레우스와 연을 맺게 된다. 펠레우스와 테티스가 낳은 아들은 바로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다.
테티스는 아들 아킬레우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영생불사의 강에 담그지만, 아킬레우스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다.
테티스가 아킬레우스를 영생의 물에 거꾸로 담글 때 잡고 있던 바로 그 발뒤꿈치, 영생의 물이 닿지 않았던 유일한 그곳에
치명상을 입은 채.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인간의 이야기이다.
신화가 상상되고 꾸며지고 포장되던 그 옛날, 그 사람들의 심장이 스며있기에 아름답고 애잔하다.
지금껏 살아남아 이야기거리의 뿌리가 되고 가지로 뻗은 그리스 신화 덕에 이 겨울 훈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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