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타베르나에서 연주와 공연에만 취했던 게 아니었나보다. 아침에 일어나니 뱃속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큰밥돌은 어젯밤에 못한 샤워를 하겠다며 캐리어백을 뒤적거리는데, 입을 런닝이 없단다.
이번엔 여행 가방을 싸면서 옷은 각자 챙기기로 하고는 확인을 안 했더니 런닝을 빠뜨리는 사달이 나버린 것이다.
편히 입을 바지도 안 가져왔더만. 업무에선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믿는 구석이 있는지 집에선 한번씩 사고를 친다.
오늘은 산토리니로 이동하는 날인데 트레이닝 바지나 런닝을 살 시간이나 있을지.
아무튼 이래저래 속은 부대꼈지만,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갔다.
별 셋 호텔치곤 조식이 잘 나오는 편인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이럴 땐 콩나물 해장국이 최곤데 말이다.
체크아웃 후 나온 아테네 거리 햇살이 너무나 맑고 눈부시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트레이닝복을 파는 옷 가게가 눈에 띈다.
얼른 큰밥돌 바지를 하나 사서 가방에 넣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속옷 가게는 보이지 않는다.
오모니아 역에서 신타그마 광장까진 두 정거장.
완공한 지 몇 년 안 된 널찍한 신타그마 역엔 역사 곳곳에 토기들이 전시되어 있어 눈이 즐겁다.
이젠 이곳에서 공항버스를 타는 일만 남았다. 버스 움직임 따라서 속도 덜컹거려 공항 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20분쯤 후, 어느 버스 정류장. 우리가 탄 버스의 기사는 그곳에 승차할 승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멈추는 시늉도 하지 않고
달려버린다. 정류장에 서 있던 사내 두엇이 일제히 기사에게 손짓을 했고, 또 한 중년여인 역시 큰 캐리어를 들고 버스 뒤를
동동거리며 따라오는데도 뭐가 그리 급한지 그냥 지나쳐버린다.
산토리니 행 항공기의 탑승 수속을 마치고 탑승구 앞에 앉아있는데 그제서야 배가 고프다.
아까 그 호텔에서 빵이라도 좀 챙겨올 걸. 손에 든 가방을 뒤져 쿠키 몇 조각으로 배를 채우고~
탑승구가 열리고 셔틀 버스를 타고 항공기 앞까지 이동했다.
뭐야, 이게 이게 비행기야? 개인 비행기도 아닌데 날개에 저런 프로펠러가 있어...
지상에서 계단을 불과 예닐곱 개 밟고 올라가니 80인승 정도 작은 비행기의 출입구가 있다.
저비용 항공도 아니고 그리스 국적 항공사인 올림픽항공에서 운항하는 산토리니 행 비행기가, 세상에.
고속버스처럼 좌석은 좌우 둘씩, 웬만한 성인남자는 머리가 천장에 닿은 정도로 실내가 낮다.
과연 제대로 뜰 수나 있을까 몰라. 비행기 타면서 비행 걱정하긴 처음이네.
엄청난 소음이 내내 귓속을 괴롭혔지만 뜨긴 뜬다. 40분 후 산토리니다.
예약한 호텔에서 마중 나온 그리스 남자가, 호텔명과 큰밥돌 이름이 적힌 작은 종이를 들고 서 있다.
우린 그냥 저 그리스 남자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7-8분 후, 멀리 동쪽 바다가 보이는, 산토리니 중심마을 피라의
아담한 호텔에 다다랐다. 영어가 유창한 젊은 여직원이 우리를 기쁘게 반겨준다.
와, 하늘 참 파랗네. 얼른 점심 먹고 나가자~ 간이부엌이 있는 호텔이라 라면 끓여먹기에 딱이다.
그리스는 면적의 20%가 3,0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에게 해를 끼고 있는 산토리니는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섬이다.
산토리니에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몇 차례의 화산 폭발로 인해 기원전 15세기, 당시의 미노아
문명은 화산재 아래로 숨어버렸다고 한다.
파란 지붕의 그리스 교회를 지표 삼아 여러 갈래 골목길을 걸어가니 피라 마을 중심가다.
가파른 절벽에 흰색으로 층층 지어진 건물들과 그 아래 사파이어 빛깔의 바다가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진을 통해 여러 번 보았던 광경이지만 막상 눈 아래 펼쳐지니 정말 말이 필요없다. 감탄사만 연신 토해낼밖에~
산토리니 피라 마을의 골목을 누비는 많은 여행객들의 얼굴엔 기쁨이 서려있다.
마을과 바다에 취해있는 동안 해는 더 빨리 움직였나 보다. 도끼자루 삭는 줄도 모르고 우린 그저 입만 벌리고 있었다.
피라에서 손에 잡힐 듯한 가까운 바다엔 유람선이 단꿈을 꾸는 듯하다.
(아래 크루즈 유람선 사진은 우연히 찍은 것인데 후에 알고보니 4월 5일, 산토리니 앞바다 2km 지점에서 침몰한 배였다.
유람선이 가라앉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때인 듯하다.)
해는 완전히 떨어져 피라 마을엔 노란 불빛이 맴돈다. 그 불빛 속에 산토리니의 하얀 빛이 투영된다.
오늘 밤 우리가 누워있는 방에도 환하고 하얀 꿈이 가득하다.
< 2007. 4.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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