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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남유럽 이야기

그리스 6 : 산토리니의 태양마차

어제 이아 마을에서 제대로 못 본 석양이 못내 아쉬웠나 보다. 내일 아침 일출이라도 보리라 다짐했으니.

숙소에서 동쪽 바다 끝이 보이니 기대도 했건만 어찌된 일인지 산토리니의 태양은 요리조리 우리를 피해가기만 한다.

오늘 아침 일출 역시 구름에 가려 보이는 듯 마는 듯. 그냥 바다나 보러 가자~

 

까마리 해변

여행지에선 부지런한 새가 모이를 더 빨리 찾고 또 멀리, 높이 날 수 있다.

너무도 지당하신 이 말씀 따라 렌터카를 떠매고 얼른 까마리 해변으로 날아갔다.

 

까마리는 산토리니가 화산섬이라는 근거를 보이려는 듯 검은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바다로, 무르익지 않은 봄이고

게다가 이른 아침이라 바다는 한없이 한적하고 고요하다. 긴 나뭇가지를 끌고 다니는 한 녀석-작은밥돌-과 낚시꾼들이

아니었다면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바다가 될 뻔했다.

아침 환한 햇살에 옅은 청록빛 바닷물이 끝없이 반짝이고 있다.

 

이제 말이지, 고대 티라 유적을 찾아가자구.

나의 어설픈 주문에 다시 운전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지도상으론 여긴데. 옳지, 저기 마침 이정표가 보인다.

티라 유적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올라간 곳은 까마리에서 계단 언덕처럼 보였던 곳으로, 아슬아슬한 도로를 타고

올라가야 했고, 나는 계속해서 해도 소용없는 후회를 해야 했다. 말도 안되게 좁고 구불거리는 도로에는 벼랑 쪽에

안전대조차 없었고 까마리 바다 쪽 벼랑은 너무나 길고 길어 끝날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우리 말고는 올라가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게다가 티라 유적 바로 앞에 이르러서는 강한 바람 때문에 유적지로 걸어올라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히스럽게도 바람 속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만은 기막히게 아름다웠다.

   

고대 티라 유적
티라 유적지 주변에서 바라본 경관

빨리 내려 가자. 이 높은 곳에서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겠어. 정상 쪽이라 그런지 바람이 더 강해지는 것 같다.

티라 유적-아무도 지키지 않는-엔 더이상 발도 못 딛고 그냥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내려가는 길도 아슬아슬. 

내려가며 차 세울 공간이 있는 곳에 잠시 멈췄다. 내려다보이는 이 예쁜 경치를 그대로 지나칠 순 없었기에. 

다시 차를 몰고 해변 쪽으로 내려가는 도중, 오토바이 한 대와 차 몇 대가 우리와 엇갈려 티라 유적지로 오른다. 

 

레드 비치

와이너리 근처에 일렬로 늘어선 여러 나라 국기와 EU 깃발 속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우리의 태극기. 

뿌듯한 마음 품고 레드비치로 간다. 레드비치는 산토리니 남단에 위치한 해변으로 붉은 돌과 모래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런데, 탁 트인 까마리와는 달리 언덕 아래에 자그마하게 숨어 자리하고 있고,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가파르고 미끄러운 길밖에 없다. 내려가 보자는 작은밥돌의 말을 들은체만체하며 언덕에서 신기한 붉은

모래와 돌들만 바라보고 있는데, 용감한 중년남녀 셋이 경사진 길을 미끄러지며 해변으로 내려가고 있다.

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인가.

 

이곳에 앉아 가까운 레드비치와 눈 앞의 에게 해를 눈에 넣으며 챙겨온 점심을 먹었다.

빵과 삶은 계란. 그러고보니 매일 열심히 계란을 먹고 있네. 세상에서 가장 맛난 점심이다.

 

레드비치 언덕에서

아테네의 고고학 박물관에도 그 유적이 남아있는, 에게 해의 폼페이인 아크로티리 유적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는데 레드비치 근처 아크로티리 유적지는 언젠가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지 않았다.

기술적인 문제로 문을 닫는다는 문구만 걸린 채.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산토리니 남단 동쪽 끝의 항구로 향한다. 아, 이 참을 수 없는 바다 빛깔.

 

렌터카를 반납해야 할 시간이 가까워온다.  그전에 해야 할 마지막 일. 이아 마을에 한번 더 가보기로 했다.

어제와 달리 청명한 날이라 하늘과 바다와 흰 건물들이 더욱 환상적인 조화를 만들고 있다.

 

하얀 동화 나라에 들어온 듯, 떼어놓는 걸음마다 하얀 향기가 숨을 쉰다.

이아 마을을 지나 다시 피라로 오는 어느 마을엔 하얀 풍차가 나풀거리고 있다.

  

숙소 전망

차를 반납하고 잠시 피라 중심을 서성이다 휴식을 위해 호텔로 돌아왔다. 

점심이 조금 가벼웠다는 여론에 따라 마지막 남은 라면 하나를 뜨거운 물에 퐁당 넣었다. 

날이 좋으니 숙소에서 바라보는 바깥도 너무나 예쁘다. 잠시 단잠에 빠진 큰밥돌.

 

하루종일 맑고 깨끗하다. 저녁 때까지도 푸르름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은 피라에서나마 노을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야외 레스토랑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봄바람답지 않게 싸늘하다. 

 

하루가 저물고 있다. 하늘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작은 화산섬으로 태양마차는 달려가고 있다.

 

 

< 2007. 4.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