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도 그다지 포근한 기후는 아니지만, 밤에는 섬이라 그런지 체감 기온이 뚝 떨어진다.
히터를 켜놓긴 했어도 밤새 때아닌 추위와 전투를 치르고 난 아침, 멀리 동쪽 바다의 하늘엔 구름이 잔뜩 뭉쳐있다.
전날 오후, 호텔에서 미리 냉장고에 넣어둔 아침 식사가 어떻게 생겼을까나.
식빵과 조각 케이크, 버터와 잼 그리고 오렌지 주스가 예쁜 바구니에 담겨있다.
식빵을 토스트기에 굽고 어제 저녁에 산 계란을 삶고, 역시 계란과 함께 구입한 우유에 콘프레이크까지 푸짐하다.
여행시 빼놓을 수 없는 문화 체험은 그 나라 텔레비전 시청이다.
텔레비전에서는 유람선 침몰사고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당연히 말은 전혀 알 수가 없고 '산토리니'라는 단어만 들린다.
나중에 남편이 호텔직원에게 물어보니 사고난 배는 1,500여명을 태운 크루즈선으로, 산토리니 앞 바다에서 침몰했다고 한다.
밖으로 나와 바라본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절벽 쪽으로 가기 전, 많은 렌터카 가게 중 한 곳에 들러 비용을 문의하니 어제 알아본 곳보다 좀 낮은 가격을 제시한다.
그럼, 오케이~ 오후부터 24시간동안 빌리기로 하고 예약을 한 후, 다시 피라 중심가로 천천히 걸어가 보았다.
항구에서 피라마을로 올라오는 600여개의 계단이 끝나는 곳 근처에 재미난 당나귀역이 있는데, 항구에 도착한 여행객들은
걸어오르기 힘든 계단을, 당나귀를 타거나 케이블카를 이용해 이동한다.
이른 시각도 아닌데 문을 연 카페가 별로 없다.
다들 야행성인가. 아침에 나다니는 여행객들도 많지 않다.
골목과 계단을 여러 차례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전망 좋은 카페 하나를 찾았다.
바다가 보이는 가장자리 쪽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절벽에 지어진 하얀 집들처럼 머릿속도 뽀얘지는 것 같다.
이 시간만은 세상 근심 모두가 구름처럼 흩어진다. 하늘은 흐려도 바다 색깔은 그대로다.
라면 한 사발을 점심으로 들여놓고 렌터카 가게로 갔다.
계약서를 쓰던 직원이 우리가 예약한 조건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여사장을 데려온다.
못 마땅한 표정의 여사장은 우리 이야기에 이내 수긍하더니 '마티즈'를 가리키며 그걸 타란다. 아까랑 얘기가 다른데.
처음 예약한 직원에게 항의를 하니 현대 게츠-한국에선 클릭-를 내준다.
차에 타자마자 비상이다. 연료 표시등이 깜빡거린다. 다행히 300m 앞에 주유소가 있다.
큰밥돌은 'full'을 외치고 나는 많다고 만류하고. 어쨌거나 우린 이제 이아 마을로 간다.
피라에서 승용차로 15분을 달려 이아(오이아) 마을이다.
이아 마을은 해마처럼 생긴 산토리니의 최북단 서편에 자리한 마을로, 산토리니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희디흰 골목마다 또 건물마다 그 모양새와 빛깔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산토리니에서 제일 예쁘고 아기자기한 곳이다.
저기 보이는 에게 해.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테세우스의 아버지인 아테나이의 왕 아이게우스는 미노타우르스를 없애기 위해 크레타로 간 아들
테세우스와 약속을 한다. 거사에 성공하고 돌아오면 배에 햐얀 돛을, 실패하거나 죽임을 당했을 때는 검은 돛을 달기로.
그러나 미노타우르스를 없애고 용감히 귀국하던 테세우스는 배에 검은 돛을 달아버리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되고,
멀리서 검은 돛단배를 지켜보던 아이게우스는 아들의 죽음을 비관하여 바다로 자신의 몸을 던지고 만다.
아이게우스의 비통함이 서린 바다. 그래서 '에게' 해가 되었다고 한다.
석양을 조망하기엔 이른 시각.
잠시 근처 포구를 둘러보기로 했는데, 포구 근처의 가파른 도로에 일렬로 선 승용차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어느 새 하늘은 개고 바다 위에선 가느다란 햇빛이 부서지고 있다. 저기 보이는 식당에 가볼까.
포구에서 올라와 다시 이아 마을의 중심.
노을을 감상하기에 괜찮은 레스토랑에 앉았다. 레스토랑과 주변 골목엔 석양을 보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그런데, 하늘에 다시 구름이 몰리기 시작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를 세웠지만 끝내 저녁 해는 구름의 아성을 뚫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피라의 숙소로 돌아오니, 밤 뉴스에서도 여전히 유람선 사고 소식를 전하고 있다.
멀리 불꽃놀이 소리와 함께 젊은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산토리니 축제의 밤은 깊어가고 있다.
< 2007. 4.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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