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키오 다리를 건너 걷다보니, 한손엔 포도를, 다른 한손엔 술잔을 올려든 그리스신화 속 디오니소스가 우릴 바라보고 있다.
적당한 근육과 적당한 기럭지를 자랑하는 거리의 주신(酒神)에게서도 르네상스 발상지다운 운치가 느껴진다.
검은 디오니소스를 스친지 오래지 않아 피티 궁전이 등장해 주는데, 정확히 점심시간이다.
일단 피티궁전에서 멀지 않은 식당에서 파스타와 피자로 요기를 하고 다시 피티궁전 앞으로 움직였다.
피티궁전은 15세기,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가에 대항하기 위해 부자상인인 피티가 세우려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고,
그후 결국 메디치가에서 이 건축물을 매입하여 개축을 하였다고 한다. 참말로 인생이란...
궁전 앞의 경사진 광장에 사람들이 비둘기떼와 함께 앉아있다.
우리도 바닥에 엉덩이를 대보는데, 곧 작은밥돌이 나눠주는 과자 부스러기 따라 비둘기들이 엄청나게 몰려오기 시작한다.
궁전 위 청명한 하늘엔 꼬마녀석이 던진 프로펠러 장난감이, 풀어진 솜사탕 같은 구름과 사이좋게 어우러지고 있다.
다시 아르노 강을 건너, 손때 묻은 듯한 좁은 골목길 여럿을 지나니 가죽 냄새가 풍겨온다.
지도를 보니 시장 광장인데, 아무리 가죽이 피렌체의 대표 선수라 해도 정말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오전엔 굳게 닫혔던 두오모 성당을 보기 위해 어제도 지났던 널찍한 공화국 광장을 또 밟아 지난다.
두오모 부속 건물처럼 보이는 산조반니 세례당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
여행 전에 사진으로 미리 보았던 산조반니 세례당의 첫 느낌은 '종이로 만든 미니어처'였다.
예전에 문구점이나 대형서점에 가면 인쇄된 도톰한 종이를 손으로 뚝뚝 뜯어 간단히 조립해서 만드는 베르사유, 에펠탑,
버킹엄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사진 속의 산조반니 세례당은 그 도톰한 종이로 만든 건축물 같았다.
실제로 본 산조반니 세례당은 빛바랜 대리석들로 지어졌고 심플하면서도 매우 웅장한 정취가 난다.
이제 두오모 성당 입장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할 시간이다.
바랜듯한 흰색과 분홍, 초록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외관을 보며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고보니 입구부터 선 줄이 아주 길다.
기다려야지 뭐. 우리도 두오모 외벽 따라 늘어선 행렬의 맨끝을 찾아 즐겁게 동참해 본다.
근데, 시간이 지나도 왜 이렇게 줄이 지나치게 천천히 짧아진담. 까닭을 알고보니 새치기의 달인들 때문이다.
특히 대기줄 옆 벤치에 앉아있다가 슬며시 끼어드는 중국인들의 솜씨는 가히 묘기급이다.
유럽 어느 나라서든 질서와 예의를 지키지 않는 중국인에 대한 작은밥돌의 분노는 점점 더해만 간다.
두오모 내부의 원개 쪽엔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 체인이 드리워져 있다.
그 위 천장에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기에 디카를 이리저리 당겨보았는데 선명히 보이진 않는다.
르네상스의 기본 이념은 '가장 합리적인 건축공간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한다.
밖에서 짐작했던 것보다는 크지 않은 두오모 내부였지만 가치에 어울리는 최대의 합리성을 부여한 성당이라 여겨본다.
잠시의 휴식을 위해 호텔로 돌아오던 중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예상외도 아이스크림을 거부하는 작은밥돌.
아이스크림 먹는 어른 둘의 모습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더니 다른 곳에서 다른 음료를 먹겠단다. 그러렴.
사자와 한판 붙고 있는 호텔 근처 헤라클레스 동상도 운치 있고, 호텔 식당의 풍성한 노란 불빛도 멋지기만 하다.
호텔에서 두 시간동안 완벽하지 않은(?) 충전을 한 후, 다시 길을 나선다.
심심하다고 툴툴거리는 작은밥돌 때문에 제대로 푹 쉬지 못한 것이다. 돌아다니는 동안은 내내 힘들다고 하더니만.
어느 가락에 춤을 추고 박자를 맞춰야 할지 난제 중의 난제다.
호텔 직원에게 교통편을 확인하여 버스를 타고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간다. 20분 후, 피렌체 시내를 조망하기 괜찮은 언덕이다.
그 중심엔 커다란 광장이 있고, 광장 중앙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복제 조각상이 시뇨리아에서처럼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다비드가 바라보고 있는 아르노강으로 눈길을 돌리니 멀지 않은 곳에 두오모와 베키오 다리, 베키오 궁전이 보인다.
버스에서 만났던 연인이 우리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한다. 그리고는 우리 셋도 찍어주는 센스~
미켈란젤로 광장의 레스토랑에서 음료수를 마신 후 다시 버스에 올랐다.
하루 내내 쏘다니며 익혔던 피렌체 거리가 시야에 정답게 들어온다. 이젠 피렌체가 익숙해졌다는 것.
어제랑 오늘, 틈만 나면 가로질렀던 공화국 광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어제 광장 한켠에서 들리던 고운 목소리는 오늘도 여전하다. 광장의 저녁 식탁엔 맛과 멋이 함께 쌓인다.
라이브로 흐르는 노래와 연주 속에 피렌체의 여름밤은 시원스레 흩어진다.
< 2007. 8.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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