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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남유럽 이야기

스페인 3 : 문화라는 이름, 투우

마드리드 투우장

고대 원형경기장을 연상시키는 투우장 앞에도 엄청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투우장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미리 이곳에 도착했지만 사방엔 간식 파는 상인들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다.

게다가 인터넷으로 예매한 티켓을 입장권으로 바꾸기에도 시간이 너무 일렀다. 

쉬면서 배 채울 곳을 탐색하다 발견한 투우장 건너편의 서민적인 카페.

시원한 실내에 앉아 간단한 요기도 하고 거리와 카페의 사람 구경도 하며 시간을 채운다.

 

투우 시작 1시간 전인 6시, 투우장 매표소에 인터넷 예약 출력물을 내미니 왼편으로 가라고 한다. 

우리처럼 인터넷 출력물을 가지고 있던 백인 여인을 따라 갔더니 예약번호를 입력하여 입장권으로 바꾸는 기계가 있다.

곧 정문이 열리고 계단을 올라 야구장을 연상시키는 복도를 따라 걷는다.

투우장 출입구마다 입장을 안내하는 직원들이 모여있었는데, 티켓을 보여주니 들어갈 출입문 번호를 알려준다.

 

마드리드 투우장

투우장의 좌석은 경기 관람 중 햇볕 받는 정도에 따라 Sol(양지), Sol-Sombra (양지 후 음지), Sombra(음지)로 구분되며,

상하 위치에 따라 Barrera(바레라-맨앞), Tendido(텐디도-1층석), Grada(그라다-2층석), Andanada(안다나다-3층석)로 나뉘는데,

양지와 음지 간 좌석의 가격 차이는 세 등급으로 나뉘지만 상하 좌석은 각 등급 간에도 줄마다 다 티켓의 가격이 다르다. 

우리 자리는 Tendido(1층석)에 Sol-Sombra(양지-음지)인데, 운이 좋게도 처음부터 햇볕이 들지 않았다.

등받이 없는 돌 계단 좌석이 꽤나 불편하고 또 기온 역시 많이 높았지만, 낮은 습도와 그늘, UEFA 유로 2008 축구대회의

스페인 8강전 경기로 인한 한산함 덕분에 상당히 쾌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중석은 메워지고 경기 시작 30분전 진행요원이 경기의 경계선를 표시하는 원을 그린다.

투우의 기원은 농업과 목축업을 중요시 여겼던 고대에, 신에게 소를 바쳤던 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투우는 하루에 6경기씩 진행되는데, 경기당 20-30분이 소요된다.

투우에 등장하는 검은 들소는 태어나면서부터 투우를 위해서만 길러지며, 투우장에 내보내기 전엔 24시간 동안 암흑의 장소에

감금된다고 한다. 이유야 뭐, 들소의 야생성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여 좀더 다이나믹한 경기를 위함일 터.

비어있던 우리 오른쪽 자리에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학생들-미국인-이 재잘거리고 있다.

 

투우는 매 경기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먼저 투우에 참가하는 모든 주연, 보조 투우사들이 경기장을 가로지르며 경쾌한 행진을 한다.

 

행진 후, 들소가 경기장으로 들어오고 제일 먼저 보조 투우사인 두세 명의 불루라델로가 등장한다.

불루라델로는 '카포테'라 불리는 붉은색-또는 진분홍-의 천으로 들소의 흥분을 유도한 후 일단 퇴장하고, 말을 탄 또다른 보조 투우사인

파카도르가 등장하여 들소의 등을 창으로 찔러 기운을 빼버린다.

그 다음 나타나는 보조 투우사인 두 명의 반데리예로는 소의 목과 등에 6개의 작살을 꽂아 들소의 기세를 한풀 꺾어놓는다.

이후 마지막으로 출연하는 주연 투우사인 마타도르.

그는 물레타(긴 막대기에 감은 붉은 천)와 검으로 들소와의 아슬아슬한 연기와 유희 후 목에서 심장을 향해 검을 꽂아 들소를 쓰러뜨린다.

이때 투우사와 들소가 얼마나 박진감 있고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가 하는 것이 투우사의 능력이라고 한다.

 

2층석과 1층석에 자리한 악단의 경쾌한 음악으로 첫번째 투우가 열린다.

어느 새 투우장 한가운데를 점령한 검은 들소, 붉은 천의 유희가 끝나고 들소는 말 탄 투우사에게 날카로운 창 공격을 받는다. 

소의 등에선 고통스러운 선혈이 뚝뚝 떨어진다.

너무 비겁하고 잔인하다. 소는 한 마리인데 사람은 순서대로 여럿 나와서 농락하고 찍어대고 말야.

 

반데리예로 두 명이 붉은 천과 작살로 들소를 상대하는 사이, 두 밥돌은 휴대폰에 딸린 동영상 촬영기능을 잊지 않고

제대로 활용하고 있다. 연신 '불쌍하잖아'를 옹알이고 있는 내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연 투우사와 들소 간의 치열한 유희의 막이 내리고 들소는 관중들에게 쿵하는 울림을 선사한다. 열렬히 환호하는 관중들.

 

스페인에서 투우는 스포츠가 아닌 문화 행사라 한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조금씩 다른 문화의 차이로 이해하면 좀더 마음 편하게 관람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눈과 마음이란 것이 어찌 이리도 적응력이 뛰어난지.

처음엔 불쌍하고 안타깝고 잔인하게만 느껴지던 투우가, 아니 선혈 뚝뚝 떨어지는 들소 모습이 두 경기, 세 경기 더할수록

점점 시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익숙해지고 있다. 심지어 죽은 들소를 말들이 끌고 경기장을 한 바퀴 도는 순서까지도 말이다.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으며 세번째 경기를 마친 투우사가 경기장을 여유있게 걸으며 행진한다.

즐거운 행진을 바라보던 관중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흰 손수건을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세번째 경기가 끝나자 관중의 1/3이 우르르 퇴장한다. 우리도 갈까, 경기마다 다 비슷한데 뭐.

그러나 경기가 계속될수록 투우에 깊은 흥미를 보이는 두 밥돌, 좀더 지켜보자고 한다.

 

4번째 경기가 저편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말이 거친 들소에게 받혀 쿵~ 쓰러진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넘어진 말을 기점으로 투우장 바닥이 사방팔방으로 천 갈래 만 갈래 금이 가고 있는 것만 같다.

말 위에 있던 보조 투우사의 안전도 중요하지만, 눈을 가린 채 영문 모르고 쓰러진 말의 모습이 처연하기 짝이 없다.

 

9시가 훨씬 넘은 시각, 마지막 6번째 경기의 관전을 포기하고 돌아나온다. 

그러나 복도의 중계 화면에선 마지막 경기를 투우장 죄석에 지켜보던 이상으로 실감나게 비춰주고 있다.

마지막까지 보고 나오자니까. 투우를 새로운 취미로 삼으려고 작심한 듯한 작은밥돌의 애절한 목소리.      

     

호텔 앞 버스 정류장의 전광판엔 21시 56분의 기온이 무려 32도임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낮은 습도 때문에 몸이 느끼는 온도는 그보다 훨씬 낮다. 

 

TV에선 투우장을 텅 비게 만들었던 UEFA 유로 2008대회의 8강전 연장전 중이다.

결국 승리하는 스페인. 객실마다에서 환호와 탄성이 터진다.

마드리드의 밤, 이렇게 또 하루가 지고 있다.

 

 

< 2008. 6. 22.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