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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남유럽 이야기

스페인 2 : 마드리드 스케치

아침인 듯한 느낌에 눈을 뜨니 5시 40분, 빈과는 달리 아직 어둡다.

알람 시각까지도 꽤 남아있는데, 역시 습관은 못 속이는지 빈에서의 기상 시각과 비슷한 즈음에 눈이 떠진다.

한참을 뒤척이다 자리를 털었다. 6시반, 이제야 밖은 환하다. 어딜 가나 잘 자는 밥돌들은 아직도 한밤 중.

부엌 딸린 호텔이라 빈에서부터 끌고온 식재료들로 식사 준비를 한 후 커튼을 열었다. 

아침밥을 먹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어제 근처 마트에서 사온 과일까지 아주 든든한 아침이다. 

 

스페인은 피레네 산맥 너머 이베리아 반도의 85%를 차지하며 남한 면적의 5배에 달하는 넓은 영토를 지니고 있다.

인구는 약 4,400만 명, 그 중 수도 마드리드엔 480여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산다.

15-16세기 대항해시대에 많은 식민지를 가졌던 결과로 현재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는 무려 23개국.

 

레티로 공원

구시가로 가는 지하철 객차 안이 시원하다 못해 춥기까지 하다. 중서부 유럽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일.

소피아 미술관 관람에 앞서 먼저 들른 레티로 공원의 푸르름은 신선한 아침 공기를 선사한다.

16세기에 세워진 왕궁의 별궁 터인 레티로 공원은 일요일을 맞아 미술대회가 열리는 듯 공원 곳곳이 물감 냄새로 가득하다.

 

스물 남짓한 젊은 친구부터 6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까지 이젤 위에 각기 개성을 풀어낸다. 

공원 안 연못 옆에 앉아 아침 햇살을 달래고 있는데, 누군가 작은밥돌을 향해 '안녕' 하며 경쾌히 지나간다.

연못 주위를 산책하던 여행 온 한국인 부부가 즐거운 인사를 던진 것.  부부의 뒷모습이 눈에 익은 듯 정겹다.

 

레티로 공원

마드리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인 알칼라 문을 지나 시벨리스 광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시벨리스 광장은 광장이라기보다는 분수가 있는 교차로다. 하늘과 땅의 요정인 시벨리스를 형상화한 분수는 교차로 한가운데서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낸다. 시벨리스 분수 앞 궁전 같은 멋진 건물은 마드리드 우체국이라고 한다.

 

알칼라 문
시벨리스 광장의 분수
우체국

10시반,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하는 도중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갑자기 가슴이 섬뜩해졌다.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알 수 없는 괴물체의 출현한 것이다.

알고보니 거리의 행위예술가로, 특이하못해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한마디로 완전 간 떨어질 뻔했다.

 

잠시의 소동에도 거리는 온통 푸르다.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공원과 분수가 많고 또 습도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다보니 더운 날씨라도 상당히 쾌적하다.

회화만으론 세계 최고이며 고야와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같은 화가의 작품이 있는 프라도 미술관은 외관만 슬쩍 보고 지난다. 

사실은 어제 저녁 2-3시간이나마 겉핥기라도 둘러볼 계획이었는데 달콤한 휴식을 위해 무산시켜버렸으니 과감히 포기다.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

오늘 프라도 대신 입장할 미술관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이다.

소피아 미술관은 개관한 지 20여년밖에 안된 현대적인 분위기의 미술관으로,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 달리, 미로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피카소의 '게르니카'. 관람객들이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작은 도시로, 1937년 스페인 내란 중 독재자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폭격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마침 그 해에 열리기로 예정된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 벽화제작을 의뢰 받은 피카소는 조국의 비보에 접하자, 한 달 반 만에 벽화를 완성, ‘게르니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작품은 파리 만국박람회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순회전을 가졌는데, 스페인이 프랑코 독재 체제가 되자 피카소는 스페인으로의 그림 반입을 거부하고, 스페인의 민주주의 회복 후엔 반드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할 것 등의 조건으로 1939년 이 작품을 뉴욕 근대미술관에 무기한 대여 형식으로 빌려주었다. 그후 프랑코 독재체제가 끝난 1981년에야 스페인에 반환되어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었다가 1992년 소피아 미술관으로 옮겼다.

복잡한 구성 가운데 전쟁의 무서움,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상처입은 말, 버티고 선 소는 피카소가 즐겨 다루는 투우의 테마를 연상하게 하며, 흰색·검정색·황토색으로 압축한 배색이 처절한 비극성을 높이고 있다. 극적인 구도와 흑백의 교묘하고 치밀한 대비효과에 의해 죽음의 테마를 응결시켜 20세기의 기념비적 회화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여인들과 뿌린 염문만 한트럭반인 피카소에게도 조국에 대한 이런 신념과 의지가 있었다니. 

역시 범상한 사람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기에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겠지.

피카소와 달리의 작품만 둘러보는데도 1시간이 훨씬 넘게 지났다. 정오가 지나자 관람객들이 무한대로 입장한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은 무료관람이니 당연한 현상.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게르니카' 1937년 피카소 作, 349*775cm

호텔을 나선 지 이미 4시간이 흘렀고 여름 한낮 햇살은 뜨거워질대로 뜨거워졌다.

밥돌들은 둘이서만 긴요하게 나눈 협의 결과를 내게 통보하는데, 내용인즉 '오늘 점심은 KFC에서 먹을겨! 절대 반대하지 말라!' 였다.

치킨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반가울 리 없을 뿐더러 마드리드까지 와서 웬 치킨이냐고 반기를 들고 싶었지만, 뜨운 기운도 마다않고

치킨을 갈구하는데 차마 말릴 수는 없었다.

그래, 그러지 뭐, 그럼 푸에르타 델 솔 광장까지 가야겠네~

 

마요르 광장

솔 광장에서 멀지 않은 드넓은 마요르 광장에선 중남미 풍물전이 열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불꽃 같았지만 불꽃보다 더 뜨거운 햇살이 우릴 막아선다.

1619년에 만들었다는 마요르 광장. 탁 트인 게 아주 마음에 들어, 나중에 꼭 다시 오자구.

 

솔 광장으로 가는 길에 하몽 박물관이라 이름 지어진 상점을 발견했다.

그 안엔 지난 겨울 바르셀로나 마트에서 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하몽이 과실수에 매달린 열매처럼 걸려있다.

하몽은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1-2년간 숙성시킨 햄으로, 훈제과정을 거치지 않은 생햄이라고 한다.  

 

드디어 푸에르타 델 솔-'태양의 문'이란 뜻- 광장에 이르렀다.

여기저기 공사 중이라 굉장히 어수선한데, 마드리드의 상징인 곰 조각상이 눈길을 낚아챈다.

지도에 나온 KFC는 보이지 않고  KFC에 대한 막강한 신념을 담은 채  KFC 찾기에 몰두하던 중, 고픈 배에 아랑곳없이 들려오는

멋진 오케스트라 연주~

 

푸에르타 델 솔 광장

드디어 찾았다.

즐거운 마음에 1층에서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가득 받아들고 2층으로 올라왔는데, 실내에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다.

냉큼 1층으로 달려가는 작은밥돌. 그러나 켜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는 신통치 않은 에어컨이라니.

그래도 치킨은 맛있단다. 난 치킨에 딸려온 감자튀김만으로도 배가 그득해졌다.

 

석회빛 왕궁 앞은 시민들의 휴식처다.

그늘에 앉아 따가운 볕을 피하고 자전거와 두발 전동기로 거리를 활보하기도 한다. 곳곳에 자유가 튀고 생기가 튄다.

 

왕궁

왕궁을 지나고 광장을 건너고 긴 거리를 걸어걸어 이른, 스페인 도시마다 있다는 에스파냐 광장.

여긴 광장이라기보다는 공원이다. 뜨거움에 지쳐 벤치에 앉아, 공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세르반테스를 올려다 보았다.

그 뜨거움을 이겨보려고 밥돌들을 향해 카메라를 어림해보는데, 옆 벤치에 있던 앳된 여인, 미소 지으며 "찍어드릴까요"한다.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영국에서 대학원을 다닌다는 이 여인은 한국에서 날아온 엄마의 스페인 여행 일정에 맞춰 엄마를 만나기 위해

마드리드에 왔다고 한다. 스페인, 이탈리아 북부 그리고 슬로베니아, 우크라이나 등을 거쳐 러시아까지 기차를 탈 예정이라 하니 

듣고만 있던 큰밥돌이 위험하지 않느냐며 걱정 어린 말을 던진다.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웃던 여인.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속초까지는 배로 이동한다는데 앳된 외모와는 달리 배포가 두툼해보였다.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서 여행의 즐거움에 심장을 담그고 있을까.

 

에스파냐 광장의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에스파냐 광장의 세르반테스와 돈 키호테

아침에 호텔에서 냉동시켜 들고온 물통은 이미 완전히 비어 있다. 

에스파냐 광장의 작은 노점에서 큰 생수를 사 들고 다시 길을 나선다. 

투우 시작까진 시간이 남아 있지만,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 그리고 로시난테에게 아쉬움의 손짓을 남겨두고 투우장으로 향한다. 

 

< 2008. 6. 22.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