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어 눈을 붙였는데, 4시에 눈이 떠졌다. 혼자 있는 낯선 공간이 익숙치 않은 이유.
방음 장치가 전혀 없는 수면실이라 슬리퍼 끄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나처럼 새벽에 눈뜬 인사들이 꽤 있다.
6시가 되자 수면실 전체에 작은 알람소리가 울려퍼진다.
다들 항공기에 탑승할 여행객이니 이런 배려, 괜찮다.
톡으로 서울 가족들과 연락을 하고 수면실 바닥을 살펴보니, 대부분의 룸 앞에 실내화가 자리해 있다.
샴푸, 트리트먼트, 바디워시가 갖춰져 있는 샤워실에 들른 후, 라커에서 짐을 챙겨 8시 전 체크아웃을 한다.
2터미널에서 바라본 하늘이 참 맑고 깨끗하다. 아, 그런데 또 셔틀을 타야 하는구나.
1터미널로 향하는 셔틀버스엔 이른 시각인데도 승객이 가득하다. 8시 35분, 30.5도, 매우 뜨거운 아침이다.
제 1터미널에 도착하여 곧바로 대열에 합류하여 탑승 수속을 한다.
체크인데스크 직원은 이전 항공편의 짐표를 보자고 하더니 지금 들고 있는 캐리어까지 짐이 모두 2개냐고 묻는다.
아니, 어제 나리타로 부친 짐, 그거 찾은 게 이거야, 그러니 짐은 요거 하나야, 난 환승해서 빈까지 가는 거고.
국적 불명(?)의 얼굴을 한 직원은 내가 이렇게 말했음에도, 자꾸 옆 직원에게 물어보고 모니터 보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또 물어보고 또 모니터를 본다.
백만 년 걸려 수속을 마친 후, 시간이 몹시도 넉넉하여 세일이 한창인 공항 쇼핑몰 구경에 나섰다.
보다가 놀다가 보다가 놀다가 갑자기 머리를 스친 생각이 있어 좌석을 확인하니 통로 아닌 가운데 좌석이다.
아까 수속할 때 내 첫 마디가 '꼭 통로쪽 좌석으로' 였음에도 그녀는 멋대로 좌석을 배정해버린 거다.
다시 그녀에게 가서 항의하니 또 모니터를 응시하곤 통로석은 없단다.
지금이야 당근 없지, 1시간 전에도 없었을까. 통로석이 없었으면 그때 바로 말했어야지.
누굴 탓하랴. 탑승권의 숫자열만 확인한 내 잘못이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내가 혼자 남의 나라에서 뭐하는 거지.
탑승구 앞 구석자리 쪽에 그냥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빈으로 가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탑승을 알리는 방송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탑승해 보니 3좌석 중 역시 가운데 자리다.
통로 쪽에 앉은 체구 작은 일본 할머니가 미소를 띠며 인사를 한다. 나도 굿모닝~
창가 쪽 체격 큰 백인남자가 비좁은 좌석에서 몸을 비틀어대는 걸 보니 양편이 다 남자가 아님에 감사해야 할 듯하다.
어젯밤의 수면 부족 탓인지 이륙도 하기 전에 잠에 빠져버렸다.
음료 서빙하는 소리에 겨우 눈을 떠 맥주를 주문하니 괴써다. 1년만이구나, 괴써야, 반가워.
빈으로 가는 동안 '사운드오브뮤직'만 잠시 보았을 뿐, 기내식 시간 이외엔 거의 자거나 반수면 상태였다.
기내식은 나쁘지 않았고 1년 만에 보는 셈멜-미니 셈멜. 셈멜은 오스트리아 전통빵- 역시 괴써만큼이나 반가웠다.
암튼 장기 비행시 기내에서 이렇게나 잠을 많이 잔 건 처음이다.
기내에서 많이 잤는데도 엄청나게 피곤하다.
그러나 빈 공항에 도착하여 출구를 보니, 없던 기운이 마법처럼 마구마구 솟는다.
2009년 초까지 4년을 살았던 곳, 1년 만에 다시 찾은 곳, 늘 그리운 곳, 빈이다.
오늘 빈 공항에서 숙소까지 이동할 교통 수단은 S-bahn이다.
S-bahn은 서울의 국철-경의중앙선 정도-과 비슷한데, 공항에서 숙소까진 S7을 타고 St. Marx에 하차한 후 18번 트램으로
두 정거장만 가면 예약한 숙소에 도착할 수 있다.
벨베데레에서 멀지 않은 'Beim Belvedere'라는 이름의 이 아파트는 'waytostay'에서 예약을 했다.
유럽이나 홍콩 여행시 애용하는 숙박 예약 사이트는 'booking.com'이고, 간혹 저렴한 요금이 나와주는 '온라인투어'와
'apartment.at'도 때로 이용했지만, 이번엔 처음으로 'waytostay'를 선택했다.
예약할 당시 'Beim Belvedere'는 2인 이용시보다 1인 이용시 훨씬 저렴했고, 또 할인이 적용되는 시기에 예약을 한 터라
7박 동안 280유로의 착한 요금으로 머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약간 문제가 생겨버렸다. 빈 공항에서 짐이 금세 나오고, S반과 트램도 바로 오다보니 숙소에서 주인을 만나기로
한 시각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것이다. 아파트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도 없으니 뭐 그저 여유 있게 기다리는 수밖에.
약속시간 10분 전,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차에서 내려 반갑게 인사를 한다.
2층-우리식으론 3층-에 위치한 40m2의 원룸 아파트가 깔끔하고 이쁘다.
세탁기와 청소기는 물론 세제까지 잘 갖춰져 있고, 와이파이 잘 되고 조용해서 혼자 지내긴 괜찮은 곳이다.
할아버지가 주는 명함을 받아들고는 예약시 신용카드로 미리 결제한 70유로를 제외한 210유로를 건넸다.
자기네 아파트는 파손보증금이 없다고 살짝 생색내는 할아버지, 이럴 땐 얼른 감사의 말을 건네야 한다.
주인할아버지가 떠난 뒤, 할아버지가 알려주기도 했고 나도 약도를 통해 위치를 알고 있는 Billa에 가기로 했다.
음, 빌라를 향해 걷다보니 꽤 먼 듯한 거리인데, 그순간 저쪽에서 Penny가 번쩍하며 내 눈을 자극한다.
입구만 봐도 눈물나게 반가운 Penny, 일반적인 Penny보다 규모가 작았지만, 있을 건 다 있다.
빈에서 품질이 가장 좋고 가격 높은 마트는 Billa이고 그다음이 Spar다.
다음이 Penny와 Zielpunkt, Plus -다들 거의 비슷-이고 가장 저렴한 마트는 Hofer다.
물론 세일을 하지 않을 때의 일반적인 가격 기준이고, 내가 빈에 살 때 가장 사랑했던 마트는 단연 Spar다.
Penny에서 구입한 탄산수, 맥주, 우유, 쎔멜, 감자, 소세지, 모짜렐라, 토마토, 체리, 포도를 식탁에 올려놓으니 뿌듯하다.
셈멜과 과일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는 빈에서의 첫날, 서머타임기간이라 9시가 지나서야 어둠이 찾아온다.
하루를 보내야만 최종 목적지에 안착하는 길고 긴 이번 비행,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기에 다신 이런 비행을 선택하지 않겠지.
그러나 이러한 힘겨움 끝에 만난 '빈'은 그이름만으로도 한없는 기쁨을 준다.
그저 '빈 생활자'가 되기 위해 훌쩍 날아온 곳, 내일은 고향 같은 이 도시에서 무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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