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에 눈을 뜬, 빈에서 맞는 두번째 아침이다.
새벽인데도 어수선한 소음에 바깥을 보니 여행을 떠나는지 몇 사람이 주차된 승용차 앞에 서 있다.
남편과 1시간 동안 카톡을 주고받은 후 아침식사를 챙기고는 길을 나선다.
오늘 오전의 행선지는 묘지들이다.
우선 상트막스 묘지부터 들른 후, 중앙 묘지로 향하기로 했다.
오늘은 24시간 교통권-다음날부터는 1주일권 구입, 1주일권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으로 움직인다.
숙소 앞에서 18번 트램을 타고 상트막스 역 앞에서 내린 후 71번 트램으로 한 정거장이면 상트막스 묘지가 있다.
그런데, 처음 가는 그곳을, 지도를 들고 약도를 익혀 근처를 오락가락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이런이런, 최강 길치의 본색이 드러나는가.
이러다가 아무데도 못 가게 생겼으니 순서를 바꿔야 한다. 그럼, 확실히 아는 데부터 먼저 가야지.
다시 71번 트램을 타고 중앙 묘지 제2문(Zentralfriedhof 2Tor)에서 내리니 음악가 묘역 찾기는 식은죽먹기.
정문으로 들어서 걷다보면 왼편에 친절하게 푯말까지 있으니 누구든 금세 찾을 수 있다.
중앙 묘지의 다른 곳은 한적한데, 음악가 묘역에만 사람들이 붐빈다.
멀리서 봐도 누구의 묘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이곳을, 작년에도 왔던 이곳을 난 왜 또 들른 걸까.
음악과 관련도 없고 클래식음악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여길 또 온 이유는 기억 때문이다.
빈에 살 때, 아들녀석이 어린이였을 때, 이곳에서의 아련하고 따스했던 '시간'이라는 기억 때문이다.
열댓 명쯤 되는 중국인들이 모차르트 가묘 앞에 모여 서더니 그중 한 사람이 내게 말을 건다.
자기들의 단체 사진을 찍어달란다. 여름인데 왠지 가을 분위기 돋는 이곳에서, 찍어주지 뭐.
혼자서, 그것도 천천히 다니다보니 중앙묘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찍사 역할을 여러 번 하게 되는 여행이다.
중앙묘지에서 위대한 음악가들을 만났으나, 제대로 만나지 못한 단 한 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모차르트다.
중앙묘지에 있는 모차르트는 가묘일 뿐이고, 모차르트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상트막스 묘지다.
아까 중앙묘지 가기 전에 가려 했으나 실패했던 그 상트막스 묘지로 발길을 돌린다.
71번 트램을 오르는 내 앞에, 중년의 한국인 부부도 발끝을 올려놓는다.
차분히 대화하는 모습에 개입하려다, 내게 질문하는 것도 아닌데 대화 중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그래, 그건 바람직하지 않아, 그저 내 갈 길이나 가자고.
71번 트램에서 다시 Litfaßstraße에 내렸으나 몇 시간 전에도 찾지 못했던 곳을 단번에 찾기란 기대할 수 없었다.
지도와 약도는 변함이 없고, 일요일이라 물어볼 행인이 거의 없는 것도 아까랑 변함이 없다.
다시 오락가락이 반복되고, 아까 갔던 길 중 지도상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길로 다시 가서 조금 더 그 방향으로 움직이니
드디어 묘지 입구가 나와준다. 길은 외지고 인적이 드물어 혼자서 걸어가려니 조금 으스스했다.
상트막스 묘지는 1791년에 사망한 모차르트가 묻힌 묘지로, 사실 매장된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모차르트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묘비를 세워두었다고 한다.
살짝 오싹한 묘지 입구를 들어서서 중앙에 난 길을 천천히 따라가 본다.
공원 같고 웅장한 중앙 묘지와는 달리 이곳은 보살핌이 느껴지지 않는다.
버려둔 건 아니지만 정돈의 손길이 덜 간 곳, 그래서 진짜 오래된 묘지 같은 곳이다.
이승을 떠난 자들에 대한, 또 남은 자들에 대한 애틋함이 밀려온다.
그래도 모차르트 묘진데, 입구에 들어서면 표식이 있겠지 하는 희망은 입구에서부터 산산히 비껴갔다.
상트막스 묘지에 들어서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길을 따라 걷는 것뿐이었다.
갈림길이 나왔어도 표식이 없어서 느낌 닿는대로 덜 스산한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선택의 길을 따라가니 다행히, 드디어 음영 짙은 표식이 나와주었다.
모차르트 묘(Mozartgarb)라는 모차르트 주변엔 나무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부러진 기둥 형태의 묘비엔 그의 이름과 생몰년도만 명시되어있고, 고뇌 어린 표정의 천사상이 그를 감싸고 있다.
이승을 떠나면 이렇듯 측은한 흔적으로 살아남은 자의 가슴을 적신다는 것을 남의 나라 묘지에서 깨닫는다.
살다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마음 쓰고 목숨 걸고 중심 잃는 우리.
티끌만한 내 신념만 지키면 된다는 것을, 중심만 잡으면 된다는 것을 이승 떠난 상흔을 보며 깨닫는다.
상트막스 묘지의 정문을 빠져나올 무렵, 독일 관광버스에서 한 무리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내린다.
묘지 안에서 이승을 등진 그림자만 만난 나는, 이 무리가, 산 자들의 흔적이 반갑다.
두 묘지에서 생사를 넘나들었더니 살짝 마음이 힘들다. 좀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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