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해가 오른 아침 5시 반에 떠진 눈, 시차 적응은 물 건너 간 듯하다.
오늘의 계획을 천천히 세우고, 카톡을 주고 받은 후 8시가 조금 넘어 길을 나선다.
트램 O를 타고 라데츠키플라츠에서 내리면 쿤스트하우스빈과 훈더트바써하우스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바로 보인다.
먼저 이정표 중 쿤스트하우스빈을 먼저 고른다. 내부 관람을 정식으로 한 적은 없지만 수없이 지났던 곳이다.
건축가 훈더트바써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이 건축물의 정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가려니 10시에 오픈이라고 말하는 직원.
물론 꼭 관람을 하려는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지만 왠지 시큰둥해지려는 마음을 잡으며 시계를 보니 겨우 9시다.
그래, 그럼 훈더트바써하우스로 가지 뭐.
역시나 친절한 이정표를 잘 따르면 식은죽먹기로 이곳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다.
현재도 빈 시민이 거주하는 이 시영아파트 주변은 오전이라 인적이 별로 없었고 아주 조용했다.
수없이 왔던 여길 또 왜 왔느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그냥...'이라 대답해야 하나.
그저 일상인듯 습관처럼 이곳엘 들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말 외엔 다른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훈더트바써의 건축물에 조예가 깊지도, 관심이 지대하지도 않지만 빈에 올 때면 난 이곳에 와서 이 시영아파트에게 말을 건다.
음, 잘 있었니, 난 한 살 더 먹었는데, 난 한 해 더 노쇠해졌는데. 넌 여전하구나, 넌 여전히 근사하구나 하고 말이다.
훈더트바써하우스 앞에서 오른 트램 1번은 슈베덴플라츠에서 나를 내려준다.
슈베덴플라츠에는 몇 년 전 새로 생겼다는 노란 링 트램-별도요금 지불-이 정차해 있다.
예전엔 트램 1번과 2번이 구시가인 링을 따라 돌며 시티투어트램 역할을 했었는데, 이젠 링 트램이 그 역할을 한다.
슈베덴플라츠 저편에 자리한 우라니아 극장을 눈길을 주면서 도로를 건너 도나우 운하로 내려간다.
물색 탁한 도나우 운하는 브라티슬라바, 바카우 등으로 가는 유람선이 출발하는 곳이다.
도나우 운하로 들어온 건 처음이다.
빈에서 4년을 살 때도 슈베덴플라츠에서만 운하를 보았을 뿐 이곳은 첫 방문이다.
오늘 도나우 운하에 들른 이유는 운하 양 옆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라피티를 보기 위해서다.
그라피티는 이탈리아어 'graffito'에서 유래했으며, 고대의 동굴벽화,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현대적 의미의 그라피티는 1960년대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미국의 흑인 젊은이들이 뉴욕의 브롱크스를 중심으로 건물 벽이나
지하철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구호와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되었다. 그라피티는 초기에 인종주의· 고립· 환경오염· 정체성 상실
같은 사회 비판에 뿌리를 두었지만, 최근에는 신변잡기적인 부분에까지 작품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그라피티는 유럽과 미국 도시에서 친숙한 거리 미술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아침이라 도나우 운하엔 출항 준비를 하는 유람선과 몇몇 사람만 눈에 띌 뿐 아주 한적하다.
그라피티는 운하의 좌우벽면은 물론 컨테이너 외관 등에도 가득했는데, 개성과 감성이 돋보이는 그림이 많았다.
유화나 수채화의 질감과는 다른 독특한 느낌을 주는 그라피티엔 애환과 고뇌, 기이함과 자유가 있었다.
흐린 하늘, 이젠 슈베덴플라츠 역에서 U1을 타고 Kagran역으로 간다.
작년에 아들과 빈에 왔을 때도 들렀던 곳, 아니 여러 번 들락거렸던 곳인 Kagran역엔 우리들의 오랜 추억이 있다.
이곳엔 아들이 다녔던 국제학교가 있고, 빈에 살던 집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는 정류장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눈과 입, 심장을 책임져 주었던 도나우젠트룸이 있다.
무료와이파이가 빵빵하게 잡히는 도나우젠트룸의 벤치에 앉아 서울과 빈의 소식을 주고 받았다.
더바디샵엘 들르고 치보 앞을 기웃거리고 또 거대한 종합마트인 인터슈파에서 기억들을 건져올린다.
도나우젠트룸에서 2시간을 보내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바닥이 흠뻑 젖어있다.
그새 짧지 않은 소나기가 내렸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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