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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17 스페인

6. 세비야의 뜰, 스페인 광장 : 1. 13 (금)

앞선 글에서 패키지 여행의 장점에 대해 준비없이 여행할 수 있는 편리함과 기동력, 시간 절약을 언급했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은, 아니 어쩌면 정말로 중요한 패키지 여행의 장점이라면 한정된 시간 동안 많은 곳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여행지의 딱 랜드마크만을 골라서.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최대한의 여행지를 거치는 여행은 장점인 동시에 치명적 단점이 된다.

오늘의 여행지는 세비야, 미하스, 그라나다로, 하루에 2번 이동을 하고 3곳을 여행한다. 이는 장점일까, 단점일까.

 

세비야 변두리 호텔
세비야 변두리 호텔
세비야 변두리 호텔

아침 7시 30분, 조식당으로 향한다.

변두리에 위치해 있지만 행정 구역은 어엿한 세비야에 자리한 4성급 호텔이라 조식도 아주 괜찮다.

호텔 규모가 크고 위치도 아주 외곽은 아니어서인지 한국인단체 외에 다른 인종의 여행객들도 꽤 눈에 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어디든 자유롭게 앉아서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패키지여행에선 때론 조식은 물론 일반식당에서도 여행팀의 자리가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지정좌석만으로도 부족하여 중학교 학생식당처럼 테이블들을 서로 쭉 길게 붙여있는 경우도 많았다. 불편하게시리.

 

세비야 스페인 광장
세비야 스페인 광장
세비야 스페인 광장

어제 저녁 플라멩코로 시작된 세비야 여행은 오늘 아침엔 세비야 스페인 광장에서 시작한다.

스페인 광장이란 명칭은 스페인의 거의 모든 도시마다 있는데, 그중 단연 으뜸이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이다.

2008년 여름 기억 속에 떠오르는 마드리드와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을 비교 대조해보면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은 광장이라기보다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산초판자의 조형물이 있는 공원이고, 세비야 스페인 광장은 거대함과 섬세함이 엄청난 곳이었다.

역시나 그 기억 그대로 2017년 1월에도 세비야 스페인 광장은 대단하고 굉장하다. 

 

세비야 스페인 광장
세비야 스페인 광장
세비야 스페인 광장

세비야 스페인 광장은 1929년 중남미 박람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4년에 걸쳐 조성하였는데, 매일 1,000명 이상의

공사 인원이 동원되었다. 가이드씨엔 의하면 이슬람,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이 혼재된 공간으로, 광장 전체적인

형태가 팔을 벌려 포옹하는 형태이며, 타일로 만든 의자는 A부터 Z까지 순서대로 스페인 도시의 휘장과 지도,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고 한다.

 

아침부터 광장엔 손님들이 많다. 겨울이라 우리처럼 따스한 유럽을 찾은 한국인 단체손님들이 참으로 많다.

우리도 함께 웃고 함께 떠들고 함께 사진을 찍으며 아름다운 공간에서 주어진 아름다운 시간을 알차게 조성하고 있다.

 

운동장 같은 광장 중앙을 걷고 타일 의자에 앉아보고 분수의 물줄기를 응시하며 짧은 동영상을 찍어 남편에게 보냈다.

남편의 답장 톡, 9년 전에 거기 갔을 때 아들녀석이 삐졌던 일이 떠오르네. 그랬었지, 우리녀석 근데, 왜 삐졌었지.

 

콜럼버스 기념탑
세비야 구시가
세비야 구시가

세비야 알카사르의 바로 북쪽, 대성당의 바로 동쪽은 미로 같은 세비야의 구시가, 산타크루스 지구다.

스페인 광장에서 버스로 잠시 이동하여 멈춘 곳은 산타크루스 지구 초입에 자리한 콜럼버스 기념탑 앞.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이 조형물엔 숫자 1492와 이사벨, 페르난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세비야 산타크루스 지구
세비야 산타크루스 지구
세비야 기념품

산타크루스 지구 한 건물 앞에서 벽면에 붙어있는 그림과는 사뭇 다른, 작은 병원의 역사를 들으며 또 로컬가이드를 기다린다.

패키지여행에선 잠시의 대기 시간도 그냥 무심히 흘려보낼 수는 없다.

자그마한 광장에 펼쳐진 야외탁자의 의자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기념품점 순례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찰나의 자유 시간을 힘차게 누려야만 곧 있을 옥죄는 시간을 인내할 수 있으니까.

 

세비야는 스페인의 도시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고 그 이유 중 첫째가 바로 미로를 품고 있는 산타크루스다.

도무지 찾을 수도 알 수도 없는 좁은 길이 수 갈래로 이어지지만, 신기하게도 길의 끝엔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기다리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하얀 벽면들로 둘러싸인 산타크루스인 것이다. 혹, 길을 잃으면 또 어떠리, 기약 없이 쉬어가면 되는 것을.

 

세비야 산타크루스 지구
세비야 알카사르
세비야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으로 가는 도중 산타크루스를 헤매고 다니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줄 거리의 음악가가 등장했다.

우리 여행팀 주변을 맴돌면서 신나는 또는 애잔한 기타 연주를 하늘과 땅 사이에 흩뿌려댄다.

덕분에 즐겁고 기분 좋아진 우리, 물론 공연 관람료는 유료다.

 

세비야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콜럼버스 묘)
세비야 대성당

16세기 초에 완공된 세비야 대성당에서 가이드씨의 해설은 길고 길었다.

'도마뱀의 문'에 얽힌 이야기, 성당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무리요'의 성화에 관한 이야기, 성당 내 크고 작은 유적과 성물에

대한 설명, 그리고 스페인 4왕국의 왕이 들고 있는 콜럼버스묘에 얽힌 사연까지, 듣고 잊을 또 들으면서도 기록하지 않을,

흥미의 대상이 되지 못할 -나만 그렇게 느꼈을 수도- 긴긴 이야기가 펼쳐진다.

 

유럽의 성당을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닌 내가 성당 내부에서 즐겨하는 일은 정적 속을 천천히 걷는 것이다.

발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생각 없이 걸으면, 성당 내부의 오묘한 기운-나는 현재 무신론자-이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장면과 상황을 자아낸다. 정적 속 걷기는 나중에 사라고사 성당에서 하는 걸로.

 

히랄다탑
히랄다탑에서의 전망
히랄다탑에서의 전망

대성당에 부속된 히랄다탑엔 가이드씨 빼고 우리끼리만 올라간다.

히랄다탑은 12세기에 세워진 이슬람 탑 위에 카톨릭교도들이 28개의 종을 달아 1568년에 완성하였고 그 위에 카톨릭신앙을

상징하는 조각상을 세워 풍향계 역할을 하게 했다고 한다. 히랄다는 풍향계, 바람개비의 뜻을 지니고 있다.

히랄다탑으로 가는 길은 계단이 아닌 경사로인데, 이슬람 시대에는 탑을 오르기 위해 당나귀를 타고 올라갔기 때문이라 한다.

34라고 쓰인 벽면을 지나면 종들이 향연을 벌이는 탑의 꼭대기에 올라 덤으로 멋진 360도 파노라마 전망까지 즐길 수 있다.

멀지 않은 곳에 투우장이 있고, 방향을 달리하면 '황금의 탑'을 안고 있는 과달키비르강이 있다.

 

다음 여행지인 미하스로 이동하기 전엔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일정이다.

식당에 다다를 무렵 가이드씨의 멘트, 원래 점심식사에 그릴이 포함되어있지 않은데, 가이드씨 자비를 들여 업글해 준단다. 왜?

석연치 않은 상황-며칠간 지켜본 가이드씨는 결코 그럴 인물이 아님-이었지만, 일단 환호하고 식당에 들어가서 보니 그릴 말고는

먹을 음식이 심각하게 부실하다.

 

우리의 불길한 예상이 맞는 건가. 아, 불신이 깊어가는 스페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