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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17 런던

10. 1 (일) : 런던이 쏟아지다

10월 1일 일요일 새벽 4시 40분, 휴대폰에서 'Our last summer'가 울려퍼진다.

9월 30일부터 10월 9일까지의 황금연휴 중 둘쨋날에 굳이 꼭두새벽을 깨운 이유는 런던여행을 떠나는 날이라서다.

 

여름 여행을 다녀오고 긴 휴가가 끝나, 일터로 복귀한 8월 하순의 어느 날.

하필이면 그날 무슨 초가을바람이 불어댔는지 항공권 예약 사이트들을 유람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날뿐 아니라 가끔 시행하는 항공권 검색은 나의 실없는 취미이기도 하다.

와이페이**, 온**투어를 비롯하여 가끔 싼 항공권이 등장하는 모*투어까지, 어마무시한 추석연휴 항공권 가격을 알고 있었기에

결코 여행을 떠날 계획이 아니었지만, 난 그저 취미처럼 추석 항공권을 뒤적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내가 알고 있던 추석 비즈니스클래스 항공권 가격이 모*투어에선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가자, 가고 싶어...

혹시나 하며 운을 뗐고 기대했던 답이었지만, 남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내 예상을 뛰어넘어 더 적극적이었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일단 예약을 하고 결제는 최대한 미뤘다.

가격이 조금 내렸다지만 추석 황금연휴에 비즈니스석이니 만만한 비용은 아니었으니까.

 

그래, 가자,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선물이야, 가자.

항공권을 결제하고 엄청난 가격의 런던 숙소를 예약하고, 11년 전과 달라진 런던 정보를 모으며 한 달을 지냈다.

우리 둘 다 여행에 미쳐 살림 완전 거덜내겠어, 게다가 이거 너무 급박한 추진력 아닌가.

빈에 살던 2006년 12월 성탄절 연휴에 방문했던 첫번째 런던에 이어 2017년 10월, 이번엔 두번째 런던이다.

 

캐세이퍼시픽 라운지

새벽 공항버스는 출발한 지 20분 만에 만석이 되었고 7시 10분,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어제 이미 온라인체크인을 해 두었고, 게다가 비즈니스클래스이니 수속은 빛의 속도로 진행되었다.

인터넷으로 환전한 파운드화를 수령하고 검색대 대기줄에 섰는데, 여행 성수기임을 일깨워주려는지 검색대를 통과하기까지

무려 50분이나 걸렸다. 그나마 출입국 심사는 지난 여름에 자동심사 등록을 해 둔 덕에 후딱 완료.

 

핀에어 비즈니스클래스 탑승객은 인천공항에는 없는 핀에어라운지 대신 같은 원월드 계열 항공사인 캐세이퍼시픽라운지에

입장할 수 있다. 라운지의 딤섬, 컵누들, 야채죽, 요거트, 카푸치노는 우리의 아침식사가 되어 주었다.

음식 종류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맛이 괜찮은 편이었고, 또 무엇보다 조용하고 안정적이어서 휴식을 취하기에 좋았다.

 

9시 40분, 1그룹으로 분류된 비즈니스클래스 승객은 제일 먼저 비즈니스클래스 전용 통로를 통해 탑승했다.

4열 중앙의 두 좌석이 우리의 터, 탑승하자마자 어여쁜 이딸라 유리잔에 웰컴드링크를 내 준다.

이코노미석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지극히 사무적인 이유- 핀에어 승무원의 미소와 함께 말이다.

소음이 차단되는 헤드폰, 클라랑스 화장품 등이 들어있는 마리메꼬 파우치, 마리메꼬 디자인의 슬리퍼와 솜이불까지

역시 비즈니스클래스는 명불허전이다.

 

헬싱키행 핀에어 비즈니스클래스

10시 30분에 이륙한 항공기는 계속되는 난기류에 30분이나 휘청거렸다.

곧 안정적 비행이 이어지면서 이코노미석와 비교불가인 크고 선명한 모니터로 영화 '콩, 스컬아일랜드'를 즐감한다.

 

마리메꼬 디자인의 폭신한 솜이불이 참 보드랍다고 느낄 즈음, 점심식사가 제공되기 시작했다.

음료와 에피타이저가 서빙된 후엔 흰 테이블보가 깔리고 전식, 본식, 후식이 순서대로 그 위에 놓인다.

그러니까 맥주와 메밀전병 채소쌈을 먹은 후 완두콩 스프, 새우와 가리비가 주재료인 해물 요리,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골랐다.

식기는 모두 이딸라 제품이었고 맛 또한 괜찮으니 우린 우주의 하늘에서 완벽하게 귀빈 대접을 받은 것이었다.

 

헬싱키행 핀에어 비즈니스클래스

점심식사 후엔 완전 평행인 좌석에 180도로 누워 안온한 휴식과 낮잠에 잠긴다.

비즈니스클래스, 무슨 말이 필요하랴. 형언할 수 없이 편안하고 평안했다. 허리도 다리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기내는 너무나 평화롭게 고요하고, 승무원이 가끔씩 초콜렛 등의 간식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내셔널갤러리 작품 설명서인 '유럽 미술관 순례'를 읽었고, 영화 '조작된 도시'를 보면서는 현실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는

영화 내용의 무시무시함에 모골이 송연하게 두렵고 오싹했다.

 

헬싱키행 비즈니스클래스 두번째 식사
헬싱키 핀에어 라운지
헬싱키 핀에어 라운지

간단한 두번째 식사를 마친 후 오래지 않아 항공기는 예정보다 일찍 흐리고 서늘한 헬싱키 공항에 도착했다.

탑승교 대신 버스로 이동했고, 헬싱키 핀에어 라운지에서 최종 목적지인 런던으로 가는 항공기를 기다렸다.

처음엔 아늑한 라운지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워지자, 우린 라운지를 나서 탑승구 쪽으로 이동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린 높은 인구밀도과 심한 북적거림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얼른 탑승구 근처 한적한 곳에 자리했다.

 

헬싱키발 런던행 기내
헬싱키발 런던행 기내

헬싱키 공항 50C 게이트를 통과한 우린 빗방울 떨어지는 헬싱키 하늘 아래 다시 버스로 항공기 앞까지 움직인다.

런던행 소형 항공기는 별도의 비즈니스석이 있는 건 아니고, 앞 6열까지를 비즈니스석으로 삼아 3-3좌석의 중앙석을 블럭으로 비워서

좀더 여유로운 공간을 제공한다.

역시나 제대로 된 한 끼의 식사까지, 그러고보니 오늘 정말 심각하게 많이 먹었다. 

식사 후, 승무원이 입국 카드와 함께 비즈니스클래스 승객을 위한 Fast Track을 내민다.

 

히드로익스프레스
패딩턴역

Fast Track 덕에 광속으로 입국심사를 마치고 캐리어 역시 빨리 나와주었으니 패딩턴행 히드로익스프레스만 타면 된다.

히드로익스프레스는 공항에서 패딩턴까지 15분만에 직통 운행하는 공항열차로, 홈페이지에서 미리 예약하면 할인된 가격으로

티켓을 구입할 수 있다. 근데, 오늘 히드로익스프레스는 20분이 넘게 걸리네...

 

패딩턴역에서 예약한 호텔까지는 도보 10분 거리다.

그런데, 이게 웬일, 역을 나오면서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이상스레 돌며 헤매다 잘 사용하지 않는 구글맵을 켜서 천신만고(?) 끝에

호텔에 도착했다. 우린 런던 하늘이 어두워서 헤맸을 뿐이야, 가을 밤하늘이 너무 어두워서 말이지.

 

The Blake More Hotel
The Blake More Hotel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예약 바우처를 내민 우리에게 호텔 직원은 객실이 예약되어있지 않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던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

우린 분명히 ㅁㄷ투어-부킹닷컴보다 무려 10만원이나 저렴해서-에서 이 호텔에 3박 예약을 했고 결제까지 해서 받은 바우처라니까.

 

남편이 다시 확인 요청을 했지만 돌아온 답은 시종일관 같았다.

1시간 가량 직원과 얘기하면서 직원은 직원대로 우린 우리대로 확인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남편이 ㅁㄷ투어의 유럽 현지 연락처로 전화를 했지만 연결되지 않았고 국내 고객센터도 역시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우리가 호텔 리셉션에서 넋을 빼고 있던 시간동안 다른 여행객들은 예약 확인을 재빨리 마치고 객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호텔 직원은 다행히 객실이 남아있으니 요금-보증금인지 1박 요금인지-을 지불하고 일단 투숙하라고 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확인할 방법을 서로 찾아보기로 한 후 캐리어를 끈 채 객실로 옮기는 발걸음이 무쇳덩어리 같았다.

이렇게 어이없을 수가, 십수 년동안 수없이 유럽 도시들을 여행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잠도 오지 않는 런던의 첫 밤이, 아니 첫 새벽이 심장 저리게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