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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17 런던

10. 2 (월) 전 : 내셔널 갤러리에서

The Blake More Hotel

어제 밤 늦게 객실로 들어왔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숙면은 취하지 못한 채 두세 시간 동안 뒤척이기만 하다 새벽 3시경-서울은 아침- ㅁㄷ투어 고객센터에 다시 전화를 했으나

공휴일이라 근무시간이 아니라는 자동응답기만 돌아간다.

이 상황에서 더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홈페이지 고객의 소리에 글이라도 남겼고, 별 소용없어 보이긴 했지만,

전에 내게 호텔 확약 문자를 보내준 직원의 핸드폰으로 어제에 이어 다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 여행사에게 고객은 어떤 의미일까.

ㅇㄹㅇ투어의 경우 추석연휴 긴급연락처가 홈페이지 메인에 제대로 떠 있는데, 여긴 없다. 휴일엔 연락불가다.

런던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 여행사에 컴플레인을 했지만 그들은 호텔 책임이라며 진심 없는 유감만을 전할 뿐이었다.

 

The Blake More Hotel 조식
The Blake More Hotel
The Blake More Hotel 앞 거리

아침 7시, 리셉션에 호텔 예약 문제를 재문의하였으나 어제와 달라진 것 없이 호텔 책임자의 출근을 기다려야 했다.

그럼, 한숨 돌리고 일단 아침부터 먹자.

조식당의 직원은 조식당을 들어서는 투숙객에게, 일반 식사에 영국식 식사를 추가해서 먹으려면 비용이 추가된다는 안내를

일일이 하고 있다. 우린 아직 정신이 없어서 그냥 기본만 먹을 건데.

 

9시, 리셉션 앞 로비의 탁자에 앉아 예약 확인을 기다리며 남편은 내셔널갤러리 책자를 뒤적인다.

그러게, 오늘 내셔널갤러리 가기로 했는데, 우리 그냥 나갔다 올까. 그동안 해결될 테니 우선 나갈까.

아니, 예약 확인이 돼야 마음 편히 다닐 수 있으니 기다린 김에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예약 확인은 1시간이 넘어서야 결론이 났는데, 드디어 3박 예약에 사전 결제까지 확인되었으니 호텔 직원 왈, 걱정 말란다.

그나마 다행이라 위로하며 10시, 드디어 길을 나선다. 우리 마음처럼 하늘도 처절하게 맑다.

 

뭐가 문제였을까. 런던의 호텔 측에선 자기네 나라로 여행 온 이방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 예약 확인을 했고,

한국의 ㅁㄷ투어는 동포인 고객이 타국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게 된 원인을 철저히 모두 남의 나라 호텔 시스템에 전가했다.

귀국 후 컴플레인했을 때 유럽 비상연락처로도, 한국여행사로도 연락불가였던 상황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 사태를 통해 얻은 교훈, 숙소 예약은 어느 사이트를 통해 하든 반드시 미리 호텔에 메일을 보내 예약 확인 절차를 거칠 것.

 

패딩턴역
내셔널갤러리

내셔널갤러리에 가기 전 들러야 할 곳이 있었으니 패딩턴 기차역이다.

어젯밤엔 어두운 런던 하늘 덕에 패딩턴에서 호텔까지 잠시 헤맸으나 오늘 아침엔 도보 10분 만에 거뜬히 그곳을 찾아냈다.

패딩턴역에서 우린 1주일용 트래블카드 구입과 함께 2For1 카드를 발급 받았다.

2For1 카드는 내셔널레일 기차역에서 트래블카드를 구입하는 경우 무료로 발급 받을 수 있는데, 런던탑 등의 많은 명소를

1인 요금으로 2인이 함께 입장할 수 있다.

때론 온라인 예약이 필요하기도 한 2For1 카드는 포토카드라서 사진 지참이 필수다.

 

Charing Cross역에 위치한 내셔널갤러리의 하늘엔 옅은 흰 물감을 뿌린 듯한 구름이 펼쳐져 있다.

내셔널갤러리 건물을 보니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이어진 마음 고생이 스르르 빗장을 열고 기체가 되어 날아가는 듯하다.

1824년에 개관한 내셔널갤러리는 지금의 장소로 1837년에 이동했고,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유럽 회화를 2,300점 이상 보유한,

단어 그대로 최고의 회화를 소장한 영국 국립미술관이다.

 

클로드 모네 '생 라자르 역(1877)'
클로드 모네 '수련이 핀 연못(1899)'

입장료는 무료였지만 양면 인쇄된 1장 짜리 A3사이즈의 층별안내서는 유료.

이 어마어마한 그림들을 공짜로 볼 수 있다니 한글로 된 안내서에 £2를 지불하는 건 어쩌면 필수일지도 모르겠다.

2006년 성탄절 연휴 첫날인 12월 23일, 영국박물관과 내셔널갤러리 두 곳을 하루에 아니 한 나절에 다 해치우느라

대충 훑었던 속상함을 이제야 해소해 보려 한다.

 

내셔널갤러리의 전시실은 네 구획으로 분류된다.

1991년에 신축한 세인즈베리관(51~66실)에는 1250년부터 1500년까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본관 중 서관에는 1500년부터

1600년(2~14실), 북관(15~32실과 37실)에는 1600년부터 1700년, 동관(33~36실, 38~46실)에는 1700년부터 1900년의 회화 작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린 동관에서 클로드 마네를 제일 먼저 만났다. 마네의 <생 라자르 역>은 굵고 거친 선의 물감들로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빛으로 이해하고 색으로 잡아내어 파리의 근대적 인상을 표현했다.

<수련이 핀 연못>은 실제 자연색을 벗어난 다채로운 색들이 짧은 붓질로 이어져 있다.

 

빈센트 반 고흐 '의자(1888)'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1888)'

빈센트 반 고흐. 영화 '러빙 빈센트'에서 그를 만난 후라 오르세에서 본 고흐보다 더 절절하다.

<의자>는 그가 아를에서 고갱과 함께 생활하던 시기에 그렸는데, 고흐가 당시 집착하던 노란색 투성이다.

아를에서 그린 <해바라기>는 태양을 향한 열정을 뜻하지만, 독특한 그의 노란색은 삶이 아닌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2006년 12월엔 촬영금지였던 내셔널갤러리도 이젠 노플래시로 얼마든지 그림 촬영이 가능하다.

하지만 내셔널갤러리는 지난 여름의 오르세미술관보다 촬영에 열 올리는 사람들이 적어서인지 편안하고 차분한 분위기다.

 

조르주 피에르 쇠라 '아니에르의 수욕'
폴 세잔 '목욕하는 사람들'
내셔널 갤러리

조르주 피에르 쇠라는 노동자들이 아니에르에 있는 센 강변에서 휴식하고 있는 모습을 <아니에르의 수욕>에서 점묘법으로 묘사했고,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세잔은 해수욕 장면을 비롯하여 목욕하는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그림을 그렸는데 <목욕하는 사람들>은 

그 중 한 작품이라고 한다. 

전시실 중심을 긴 소파가 채우고 있는 내셔널갤러리, 역시 그림은 멀리서 천천히 감상하는 것이 정석이다.

 

페터 파울 루벤스 '삼손과 델릴라'
레오나르도 다빈치 '암굴의 성모'
미켈란젤로 '그리스도의 매장'

성서나 교회에 관심도 지식도 없지만, 바로크의 대가 페터 파울 루벤스가 그린 <삼손과 델릴라>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인

<암굴의 성모>도 그 거대함과 위대함은 외면하기 어렵다. 내셔널 갤러리의 <암굴의 성모>는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된 또 다른

<암굴의 성모>와는 달리 세례 요한과 아기 예수, 성모 마리아의 머리 위에 후광이 있다. 

미켈란젤로의 <그리스도의 매장>은 미완성작으로, 죽은 그리스도를 내려 무덤으로 운반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 한다.

 

한스 홀바인 '대사들'(1533)
한스 홀바인 '대사들'(1533)

내셔널 갤러리의 최고 인기작 중 하나인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앞 적절한 거리에 긴 벤치가 놓여있다.

르네상스 걸작인 <대사들>은 영국에 와 있던 프랑스 외교관 장 드 댕트빌과 조르주 드 셀브 프랑스 대주교를 그린 그림이다.

 

그들 사이의 선반에는 당대 최신 과학 기구인 나침반, 천구의, 해시계 등과 지구본, 악기, 찬송가 책 등이 놓여 있고,

그 선반 위 사물들은 두 대사가 지닌 지식이 하늘로부터 땅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한다.

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떠 있는데, 이는 그림 오른쪽에서 비스듬한 각도로 바라보면 해골의 형태다.

해골은 모든 것은 마땅히 죽음에 이른다는 뜻이라 한다.

즉, 이 그림은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지식은 그것이 경이로운 것이라 해도 신의 뜻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내셔널 갤러리

그리스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후에 따로 글 쓸 예정-도 거의 본 듯하고, 내셔널갤러리에서 손꼽히는 그림들도 다 만난 것 같은데,

뭔가 허전해서 기억과 메모를 더듬어보니 얀 반 베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확인을 해 보니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는 특별전이 열리는 유료 전시실에 있다고 한다.

그래, 그러면 특별한 우린 특별하지 않은 마음으로 그 전시실엔 입장하지 않기로 했다. 

 

내셔널 갤러리
트라팔가 광장

걱정이 사라지고 나니 하늘도, 구름도 내셔널갤러리 앞 트라팔가 광장마저도 맑고 다사롭다.

모든 일은 정신이 지배하고 그래서 마음 먹기 달린 것인가.

이제 옥스퍼드서커스역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