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마지막과 첫 2월이 만나는 한 주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바빴다.
아니, 이즈음 몰릴 수밖에 없는, 몸까지 써야 하는 나의 업무 덕에 정신 뿐 아니라 육신까지 파김치가 되었다.
게다가 여행 출발 전날은 전보 발령일이라 새 근무지에 서류를 제출한 후,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선 남은 자들을 위한
반찬 준비와 청소, 빨래를 해야 했고 밤이 돼서야 대망의 마지막 순서인 짐 싸기에 돌입했다.
서너 시간 눈을 붙였을까. 새벽 4시반, 알람이 울린다.
준비에 부족함 없으리라 여겼던 1시간은 후딱 흐르고 가방과 캐리어를 확인 또 확인한 후 집을 나선다.
토요일이고 설 연휴 첫날인 셈이라 공항 가는 도로에 자동차는 많지 않았지만 공항버스의 좌석은 순식간에 채워지고 있다.
우리가 탈 폴란드항공은 10시 50분 출발이고 체크인카운터는 출발 3시간 전인 7시 50분에 오픈한다고 하니
인터넷으로 신청한 포켓와이파이를 먼저 수령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데이터 사용을 위해 남편만 로밍을 쓸까, 각자 유심을 쓸까, 아니면 공기계에 유심을 끼워 핫스팟으로 함께 사용할까 등
여러 생각을 했지만 폰번호를 유지-남편에게 꼭 필요-한 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포켓와이파이를 대여하기로 했던 것이다.
작년 여름 여행에서도 대여했던 B카운터 근처의 포켓와이파이 대여소는 떠나는 여행객들 맞느라 북새통이었다.
번호표를 뽑고 15분을 기다려 포켓와이파이를 넘겨 받았다.
LOT 폴란드항공 체크인카운터가 열리고, 긴 이코노미 줄과는 달리 비즈니스 라인은 단출했다.
금세 수속하고 입장한 아시아나 라운지에 앉을 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사람들이 정말 많다.
어제 바르샤바를 출발한 폴란드항공 편명 LO97의 B787-8기는 오늘 아침 제시각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2016년부터 인천에 취항한 폴란드항공은 인천에서 바르샤바까지 주 5회 운항하는데, 타 항공사에 비해 지연 출발이나 연착이 많아
LOT의 의미를 'Late Or Tomorrow'라고까지 빗댈 정도다.
이미 명성(?)은 조금 알고 있었지만 flightaware를 통해 확인해 보니 정말 어마무시했다.
바르샤바에서 제때 출발하지 못하면 인천에 연착했고, 그 항공기가 다시 바르샤바로 운항하니 그 항공편도 당연히
지연 출발에 연착이었다. 어떤 경우는 48시간 동안 두 도시 왕복하는 중 4차례 모두 연착한 경우도 있었다.
폴란드 국영항공사라더니 항공기 수가 절대 부족한 것인지, 아님 정비 인력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무튼 다행히 제때 인천으로 들어온 LO97편은 LO98편이 되어 제시각에 탑승을 마치고 인천공항을 출발한다.
무뚝뚝한 표정의 승무원으로부터 웰컴드링크를 받은 후 둘러보니 전체 비즈니스석 중 서너 자리가 비어있다.
이륙한 지 오래지 않아 승무원이 점심식사 주문을 받는다.
폴란드 항공의 드림라이너 기종은 창문에 블라인드가 없고 버튼으로 색을 조절하는데 가장 어둡게 해도 강한 햇빛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하는 단점이 있고, 좌석의 피치가 길어서 화면이 먼 것도 좀 불편했다.
전식부터 차례대로 세팅되는 식사. 난 쇠고기를 남편은 생선을 골랐는데 맛은 그다지 신통치 않다.
승무원이 트레이로 제공하는 후식을 마음껏 고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특이하다고 할까.
과일과 치즈, 케이크를 다 요청했는데 본식보다 나았던 듯하다.
폴란드 항공기에 탑재된 한국 영화는 '신과함께2, 프리즌, 물괴, 원라인' 이렇게 4편이다.
얼토당토않은 결말의 '프리즌'을 보고는 바로 누워버렸는데, 밀착형 기모바지 덕에 숙면 불가다.
한참 후, 남편이 건네주는 컵라면을 먹으며 주제 파악 불가의 '물괴'를 보고 나니 과식 탓인지 머리가 아파온다.
컵 신라면은 아주 맛있었는데 말이지.
또 한 차례의 식사를 마치고 나니 난기류 한번 없는 바르샤바행 첫 비행이 끝났다.
순식간에 입국심사를 마치고 검색대 앞에 우리도 합류했다.
그런데, 길지 않은 줄인데도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눈앞 상황을 가만 살펴보니, 젊은 한국처자 너덧 명이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구입한 액체류 화장품 때문이었다.
인천공항 면세점 인도장에선 안전하게 밀봉하여 건넸으나 EU공항 것이 아닌 이상 쉽게 통과시켜 줄 리 없을 터.
경유하는 항공인 경우 경유지에선 압수 당하는 경우도 있어서 대책을 세우거나 주의했어야 하는데, 참.
검색대 직원은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그들의 물품을 다 뜯어 확인한 후 다시 포장하여 천천히 돌려준다.
이거이거, 환승시간 빠듯한 사람은 자칫하면 큰일날 상황인 걸.
그렇게 30분 가량 기다려야 했는데, 검색대 앞 승객들은 다들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다.
찾기 쉽지 않았던 바르샤바 LOT비즈니스라운지에 앉아 물과 액상요거트만 마시고 휴식을 취했다.
꽤 많은 사람들로 조금 어수선해서 휴식하기 적절하진 않았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탑승 시각에 맞춰 도착한 36-37 게이트.
정확히 탑승하고 출발하는 밀라노행 항공기는 3-3 배열의 B737 소형 기종이다.
앞의 몇 열만 비즈니스석으로 사용하는데, 이코노미석과 차이없이 3석 중 가운데만 블록으로 비울 뿐이다.
우리 좌석은 1A와 1C, 맨 앞이라 공간이 넓다.
친절한 승무원이 건네준 저녁식사가 깔끔하다. 그런데 대체 하루에 몇 끼를 먹는 건지.
식사 후 정신을 놓고 무한대로 꿈길을 헤맸나 보다.
8시간 시차가 나니 서울 같으면 이미 자고도 남을 시각. 자다 눈을 뜨니 밀라노다.
그렇게도 일기예보가 맞지 않기를 바랐지만, 밀라노 말펜사 공항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금세 나와준 캐리어를 챙겨 4번 출입구 쪽으로 나가니 공항버스들이 줄지어 대기 중이다.
그중 제일 앞 버스 매표원에서 '첸트랄레'를 물어본 후 요금-1인 8유로-을 지불하고 캐리어를 넣은 뒤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빗속을 거침없이 달린다.
버스 안에서 켠 포켓와이파이를 통해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는 친절한 구글맵.
1시간을 달려 도착한 중앙역에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호텔까지는, 대낮이라면 아니 비만 내리지 않는다면 걸어도 충분할 거리였지만 지하철을 타고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이동했다. 단 한 정거장이었지만 말이다.
Caiazzo역에서 호텔까진 도보 1,2분 거리였고 구글맵이 있었기에 우린 헤맴 없이 안착했다.
긴 하루, 비즈니스클래스를 타고 이동했는데도 지치는 하루.
여행 첫날, 벌써 나이를 깊숙이 체감하는 하루다.
'표류 > 2019 밀라노·베네치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4 (월) 전 : 두오모 광장에서 (0) | 2019.05.23 |
---|---|
2. 3 (일) 후 : 흐린 두오모의 밤 (0) | 2019.02.18 |
2. 3 (일) 전 : 그동안 안녕, 스포르체스코 (0) | 2019.02.18 |
2019년 2월 : 밀라노·베네치아 여정 (0) | 2019.02.17 |
LOT폴란드항공 비즈니스클래스 (0) | 2019.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