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친구들과 같이 떠나는 해외여행은 처음이다.
아주 오래전 국내여행을 함께한 적이 있고, 17년 전에 다른 친구가 가족과 함께 비엔나 우리집에 온 적은 있었으나,
다같이 출국해서 동시에 귀국하는 해외여행은 진짜 처음이다.
작년 가을부터 함께 여행일자와 여행지를 선택하고 동선을 만들고 숙소를 골랐다.
코시국 이전에 비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유럽도 물가가 많이 올랐고 예약할 것이 많아졌기에 항공권과 숙소와 기차는 물론
입장권, 투어 때로는 식당과 카페까지 예약이 필요했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친구들을 대표해서 고르고 예약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상황이 달라지다보니 이러한 준비 과정을 예전처럼 신나는 마음만으로 대할 수가 없었다.
퇴직 후 심신이 편안해진 나는 직장에 다닐 때보다 여행에 대한 절실함이 줄었다.
여행을 가고 싶지 않거나 안 가도 되는 건 아니고 여행만을 바라보던 생활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직장에 근무할 땐 1년에 한두 번 떠나는 해외여행이 고단한 일상을 지탱해주는 기반이었기에, 여행은 늘 지표였고 의지였다.
그런데 이제 여행에만 목매는 상황이 아니다보니 예약이나 계획이 귀찮아진 것이다.
그래서 작년 한 달 동안 빈에 갈 때도, 올 4월 포르투갈에 갈 때도 가볍게 떠났다.
항공과 숙소 말고는 예약도 없이 별 계획도 없이 공부도 하지 않고 그냥 말이다.
이번 여행 일정은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빈이다.
많은 준비와 예약이 필요한 코스이고, 2주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4곳을 가야 하니 동선과 이동이 중요하다.
게다가 여행 전 집집마다 우여곡절이 줄줄이 생기다보니 지친 상태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어 체력 안배가 진짜 중요해졌다.
로마 가는 날, 새벽에 일어나 캐리어를 확인한 후 남편-잠시 짐꾼-과 같이 지하철역까지 이동한다.
우리 셋은 정해진 지하철역에서 만났고 공항철도로 환승하여 여행의 설렘을 안은 채 인천공항 2터미널에 도착했다.
출발 3시간 전 공항 도착, 대한항공 카운터 옆에서 웹체크인을 한 후 백드랍 카운터에서 다시 종이탑승권을 받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붐비지 않는 검색대를 거치고 자동출국심사를 마친 뒤 카페에 앉았다.
커피와 크루아상을 먹으면서 로마 지하철에서 사용할 교통비를 각자의 트래블월렛카드-트래블페이-에 충전했다.
여행에 앞서 우린 트래블페이카드를 발급받았는데, 현지 화폐로 충전하여 결제 가능하고 몇 도시에서는 교통카드로 사용이 가능하다.
특히 결제 단말기에 갖다대기만 하는 탭투탭 방식이라 더욱 편리하고 안전하다고 한다.
탑승이 늦어지고 있다. 30분 늦게 탑승이 시작되고 항공기는 그만큼 더 지연되어 이륙한다.
같은 777기종이지만, 3-4-3 배열의 KLM보다 3-3-3 배열의 KAL이 좌석의 앞뒤 좌우폭은 물론 복도도 여유롭다.
우린 가운데 3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기내는 만석은 아니었으나 빈 좌석이 많지는 않다.
이륙 1시간 가량 지난 시각, 첫번째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나와 R은 제육쌈밥-쌈밥은 원래 아시아나 시그니처메뉴 아닌가-을 골랐고 K는 치킨샐러드를 선택했다.
버드바이저와 신선한 야채가 좋았고 내 입맛엔 제육볶음의 간이 센 편, 전체적으로 괜찮은 식사였다.
넷플릭스에 올라왔으나 시청을 미루기만 했던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학교 경비원인 북한 출신 천재수학자 인민군-별명-은 '증명되지 않는 건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고달픈 상황에서도 그는 신념이 있었기에 비현실적인 비상할 수 있었던 걸까.
이륙까지 7시간 가량 남은 시각, 참을 수 없는 냄새가 기내를 채운다.
우린 모두 컵라면을 청했다. 하늘에서 먹는 라면 맛은 표현할 길이 없다. 최고다.
몇 년 전 방송되었던 예능프로그램 "스페인 하숙" 촬영지까지 2시간 넘게 차를 타고온 스페인 여인이 있었다.
배우 유해진의 팬인 그녀의 입에서 나온 영화와 드라마 제목 중 "럭키"가 있었는데, 그때 유해진의 반응이 대단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있길래 나도 봤다. 코믹하면서도 삶이 녹아있는 영화, 무겁지 않아 좋았다.
로마 도착 5-6시간 전, 모닝빵 샌드위치와 치킨불고기 주먹밥을 나눠주는 간식타임이다.
난 배가 고프지 않아서 주먹밥은 반납하고 샌드위치만 먹었는데, 이내 배가 불러와 금세 후회했다.
우리 앞 노부부는 10시간 훨씬 넘는 비행인데도, 좌석을 조금도 뒤로 젖히지 않았다.
뒷사람을 위한 배려인지 다른 이유인지, 유럽행 항공기에서 좌석을 전혀 젖히지 않는 탑승객은 처음이다.
우리 좌석은 가운데 복도 쪽이라 온몸이 뻐근할 때마다 일어나서 복도를 걸으며 움직이기에 그만이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예전보다 비행 시간이 많이 길어졌는데도 시간은 생각보다 잘 흘러가고 있다.
로마 착륙 2시간 전, 승무원들이 두번째 기내식을 나눠준다.
불고기 김치볶음밥을 골랐는데, 선택 실패다.
오후 7시 45분, 흐린 로마 공항. 낡은 항공기임에도 착륙이 아주 부드럽다.
10여개국 국민에게만 제공하는 자동입국심사-엄청난 한국여권 파워-를 마친 후 천천히 짐을 챙겨 버스에 올랐다.
로마 공항을 오가면서 버스 이용은 처음인데, 테르미니역보다 근처 버스정류장이 숙소와 훨씬 가까웠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공항에서 캐리어도 천천히 나오더니 승차한 버스 안에서도 대기 시간이 길다.
15분 후 출발이라는 버스 매표원 말과는 달리, 20분 넘게 기다린 버스는 9시가 다 돼서야 출발했다.
어둠에 싸인 로마 도로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테르미니역 근처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숙소까진 400m.
숙지한 대로 길을 따라 10분 만에 도착한 숙소 0층엔 공동 현관이 2중으로 되어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른 숙소 앞에서 다이얼박스를 열어 열쇠를 꺼낸 다음, 해당층 공동현관 문을 열고 또 우리 숙소 문을 열쇠-무려 4중-
로 열고서야 3박 동안 머물 로마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가위바위보로 방을 정하고, 짐 정리를 한 후 남편에게 톡을 보냈다.
아직 기내에 있는 듯 다리가 흔들리고, 고단한데도 통 잠이 오지 않는 여행 첫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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