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표류/2023 로마·피렌체·베니스·빈

5월 19일 (금) : 피렌체 가는 기차

새벽에 잠시 깨었다 다시 잠이 들었다.

이렇게 고단하면 이른 아침까진 죽어 잘 것 같았는데, 역시 안 되는 것-시차적응-은 안 되나 보다.

서울서 들어와있는 단톡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카레와 멸치볶음, 계란에 파인애플까지 다 챙겨먹은 후 밖으로 나간다.

 

산타마리아마조레 성당
산타마리아마조레 성당

로마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러야 할 곳은 테르미니역 근처의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이다.

로마 귀족과 교황의 꿈에 성모마리아가 나타나, 한여름 눈 내리는 곳에 성당을 지으라는 계시에 따라 5세기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로마 올 때마다 늘 그 앞을 지났고, 로마에 처음 왔던 2006년 여름에 내부 입장했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착각이었다.

호화롭고 유려한 마조레 성당 내부가 낯선 걸 보니 이번이 처음이다.

 

성 히에로니무스 유해(위)와 예수 구유(아래)
예수 구유
베르니니 묘

검색대를 통과한 산타마리아마조레성당 신랑의 이오니아 양식 기둥 바깥쪽엔 크고 호화로운 채플이 즐비하다.

무엇보다 이곳의 최고 보물은 발다키노 안 중앙 제대에 안치되어있는 히에로니무스의 유해와 제대 아래쪽 계단의 예수 구유 조각

그리고 중앙 제대 오른쪽 바닥면에 있는 바로크시대 건축가이자 조각가 베르니니의 묘다.

 

성 히에로니무스-성 제롬, 성 예로니모-는 391년부터 406년까지 신약성서를 고대 그리스어-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고,

구약성서는 처음엔 헬라어에서 번역하였으나 이후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히에로니무스 관련 설화가 있는데, 어느 날 사자 한 마리가 절룩거리며 그에게 앞발을 내밀어서 살펴보니 커다란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가 가시를 빼주자 사자는 이후 히에로니무스 곁을 떠나지 않고 그를 지켰다고 한다.

그래서 히에로니무스를 표현한 그림을 보면 사자와 함께 묘사된 경우가 많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는 17세기 로마를 가장 아름답게 장식했던 천재 조각가이자 건축가다.

그는 나보나 광장의 4대강 분수, 바티칸 산피에트로 광장,  산피에트로 성당의 발다키노와 교황 무덤, 산탄젤로 다리의 조각상

-진본은 다른 곳- 등과 보르게세 미술관에 소장된 '아폴로와 다프네', '페르세포네의 납치', '다윗' 등 조각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묘는 유언에 따라 소박하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위대한 조각가의 묘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작고 수수하다.

 

 

Italo 프리마석
Italo 프리마석

살짝 비가 내리다 그친 오전 11시, 남겨진 쓰레기를 버리고 짐을 챙겨 테르미니역으로 이동했다.

붐비는 역. 플랫폼 쪽으로 가는 승객을 대상으로 티켓 확인 절차가 필요한 걸 보면 로마 치안은 좋은 편이 못 된다.

11시 55분, Italo는 정시 출발했고 10분 후 역무원이 티켓 검사를 한다.

깨끗한 Italo는 시속 220-230km로 달리고, 오후 1시경 프리마석 승객들을 위해 간단한 간식과 커피가 제공되었다.

 

로마도 내내 흐리더니 피렌체도 많이 흐린 날씨다.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역에서 산조반니세례당 바로 옆에 붙어있는 숙소까진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살짝 괴이하고 주술스러운 인테리어의 숙소에 셀프체크인을 한 다음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눌러도 당겨도 안 되어 호스트에게 연락한 후, 친구 K가 버튼을 왼쪽-이런 집 처음-으로 밀어보니 오호, 열린다.

 

난 피렌체 여행이 3번째인데 이렇게 구시가 한가운데 있는 숙소는 처음이다.

에어비앤비 숙소 설명엔 분명 1층이라 되어있으나 0.5층-지상층인 0층도 아니고, 1층도 아닌 독일어로는 Mezzanin-에 해당되고

건물은 1600년대에 지어졌다. 0층은 아니니 굳이 말하자면 1층이긴 하다.

 

 

Osteria Nuvoli

늦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 코앞에 있는 평점 좋은 레스토랑으로 갔는데 입구는 지상이나 홀은 지하다.

8인석짜리 대형 테이블에 이미 자리해 있는 동양 남녀 옆으로 안내되자 친구가 살짝 인종 차별을 염려한다.

유럽에선 큰 테이블에 다들 합석해, 다른 데로 옮겨달라 할까 했더니 괜찮다고 한다. 문화가 다르니 오해할 수 있다

주문한 라자냐와 라비올리 맛이 괜찮다. 아니 내 입엔 맛있다.

 

 

산타마리아델피오레 성당 (두오모성당)

빗방울 떨어지는 피렌체에 여행객도 쏟아지고 있다.

로마 못지 않은 인파는 코시국에 억눌렸던 여행 수요가 엔데믹 상황이 되자 동시에 폭발한 이유일 거다.

2-3년에 나뉘어야 들어와야 할 여행객이 한 해에, 아니 한두 계절에 마구 쏟아지는 느낌이다.

두오모 성당 주변만 잠시 산책하다가 근처 마트에 들른 후 숙소로 향했다. 비도 피할 겸 휴식이다.  

 

피렌체 구시가 한복판 오래된 건물의 거실 탁자에 앉아 우린 삶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의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

피렌체 숙소에 관한 불만족은 그대로 토로했으나 여행 과정에서 드러난, 전엔 알지 못했던 성향의 차이에 대해선 표현하기 쉽지 않고,

더구나 내 고단하고 어설픈 가이드 노릇-어찌할 방법 없는-은 내가 감당할 몫이기에, 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고초는 점점 쌓여만 간다.

 

 

메디치리카르디 궁전

오후 6시반, 서늘한 피렌체 거리로 나섰다.

르네상스 양식을 표방한 최초의 궁전인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그곳에 만들어진 시민들을 위한 벤치를 보면서 지도자의 도리를 떠올린다.

다시 두오모 쪽으로 가서 체인점 Venchi에서 젤라또를 하나씩 들고는 이번엔 두오모 성당 남쪽 거리로 가본다.

 

 

오르산미켈레
시뇨리아 광장의 베키오 궁전과 로지아 란치
베키오 궁전 (현재 시청사)

내부에 기적을 행하는 성모자 그림이 있고 외벽에 14개 길드의 수호성인이 지키는 오르산미켈레를 지나면 시뇨리아 광장이 우릴 맞는다.

시뇨리아 광장 한편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복제품-이 그 앞을 지키는 베키오 궁전이 자리하고 있다.

피렌체 정부청사였고 현재 박물관이자 피렌체 시청사인 이곳은, 행사기간인지 기마병과 전통 복장의 수문장이 지키고 있다.

르네상스 회화의 보고인 우피치 미술관 앞을 밟아 아르노강변을 걸으면 베키오 다리가 보인다.

 

 

우피치 미술관
베키오 다리
아르노강의 베키오 다리 (산타트리니타 다리에서 본)

베키오 다리는 내일 건너보기로 하고 베키오를 전망하기 좋은 산타트리니타 다리로 향했다.

1345년 건립된 베키오 다리는 식품점과 정육점이 들어섰다가 16세기말부터는 금세공업자와 귀금속상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오, 이 멋진 정경. 역시 베키오 다리는 산타트리니타에서 봐야 더 멋지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산조반니 세례당
숙소 공동출입문 (0층)

피렌체 중심가에 불빛이 켜지고 우리들의 이야기도 다시 켜진다.

이탈리아 캔맥주를 들고, 감자칩과 튀긴 옥수수와 멜론을 탁자 위에 놓았다.

어린 시절은 찰나처럼 지나가버리고 삶의 작은 시련들은 과제처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린 지금 피렌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