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5시반,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샐러드와 김, 멸치볶음, 진미채 그리고 멜론까지 늦지 않은 아침식사를 챙긴 다음 두오모 성당으로 간다.
두오모 광장엔 여전히 약한 비가 내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두오모 성당 입장 대기줄이 말도 못하게 길다.
아무리 줄이 길다 해도 당연히 들어가야 할 곳-난 이미 두어번 입장했으나 친구들은 처음-이기에 긴 대기줄 끝에 섰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 바로 뒤로 새치기한 뻔뻔한 백인 남녀를 쫓아내고, 우리 뒤에 서있다가 밀려난 두 할머니를 이끌기도 했다.
우리 뒤쪽 대여섯번째 줄 선 사람 뒤로는 마구잡이로 새치기 하는 철면피의 단체여행객-30여명-과 가이드도 있었다.
1시간 10분을 기다려 입장한 산타마리아델피오레 성당에선 쿠폴라의 천장화가 압권이다.
성서 속 '최후의 심판' 내용을 화가이며 건축가, 미술이론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그리기 시작했고 이후 페데리코 주카리가 완성했다.
아름다운 쿠폴라와 색색의 대리석으로 꾸며진 외관에 비해 로마네스크 및 이탈리안고딕 양식인 내부는 수수하게 곱다.
성당 지하엔 두오모 쿠폴라의 정중앙 아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잠들어 있다.
그는 1401년, 산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공모전에서 탈락-2등, 공동제작 거절-한 후 로마와 피렌체를 오가며 17년간 건축을 공부했다.
특히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고대 로마의 건축 연구에 매진했는데, 그 영향인지 두오모 돔은 로마 판테온의 돔과 크기나 형태가 흡사하다.
두오모 성당이 완공되었으나 돔을 올리지 못한 지 40여년이 지난 1417년, 돔 설계안 공모전에서 브루넬레스키가 당선된다.
그로부터 16년 후,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사람의 힘으로는 지을 수 없다던 거대한 돔이 아름다운 자태를 만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영화 '열정과 냉정 사이' -어떤 이는 이 영화가 피렌체의 진정한 가치를 덮어버린다고 함.- 때문인지 두오모 돔과 종탑에 오르는
버킷리스트를 지닌 사람이 많다.
브루넬레스키의 돔도, 조토의 종탑도 다 아름다운 건축물이고 그 위에서 바라보는 피렌체 전망 또한 멋지지만 우리 체력으론 완전 무리,
우린 그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성당 내부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비가 완전히 그쳤다.
이제 중앙시장으로 가 볼까. 나도 피렌체 중앙시장엔 처음 가 본다.
시장 가는 길의 좌우에 가죽제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늘어서 있는데 유창한 한국말 호객이 장난 아니다.
꽃, 와인, 치즈, 과일, 야채, 해산물, 육류, 육가공품 등도 많고 시장 내에 음식점들도 내점해 있다.
더포크 앱으로 예약한 레스토랑에 12시반, 도착했다.
3년 전에도 방문했던 곳인데, 분위기와 맛이 다 괜찮아서 할인되는 앱을 통해 예약했다.
오, 이 분위기 뭐니, 여기 아주 좋은데.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즐거워하는 친구들.
창가 좌석에 앉아 토스카나식 수프, 구운 감자, 카프레제, 티본스테이크, 와인 등 다양한 음식을 주문했다.
다른 때보다 음식 가짓수가 많아서 1시간 넘게 식사를 했는데, 전체적으로 무난한 맛이다.
처음엔 조용하고 차분했던 식당이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점차 어수선해지는 걸 보니, 자리에서 일어설 시각이다.
2시, 숙소로 들어가 쉬기로 했다. 숙소가 구시가 중심에 있으니 편리한 점이 많다.
숙소 옆 건물 상점에서 판매하는 미니어처 조각품 중 다빈치의 인체비례도를 조형물로 만든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 눈에 들어왔다.
크기가 작았더라면 우리집 장식장 한켠을 차지할 수도 있었을텐데, 너무 커서 공수하기도 어려워 오다가다 여러 차례 보기만 했다.
난 20분 쯤, 친구 R은 1시간 쯤 낮잠을 잤고 K는 안 잤단다.
충분히 쉬고 난 오후 4시 반, 베키오 다리 위 호화로운 귀금속 상점들을 구경하며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아르노강을 따라 버스 타기 참 애매한 미켈란젤로 광장까지 이야기 나누며 씩씩하게 걸어간다.
어느 새 토요일, 다들 미켈란젤로 광장을 오가는지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
강변을 따라 그리고 언덕과 계단을 올라 2km쯤 걸었을까.
다다른 미켈란젤로 광장에 주말을 맞은 많은 사람들이 담에 기대어 모여 있다.
광장 담벼락에 함께 붙어 피렌체를 조망하고, 광장 벤치에 앉아 젊은 남녀의 한국어를 들으며 소회를 풀었다.
날이 흐리니 노을이 제대로 보일 것 같지 않고, 야경 보기까진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니 이제 하산할 시각.
그러고 보니 광장의 다비드-복제품, 그러나 광장의 상징-도 안 찍고 정신머리가 없다.
카메라 렌즈가 고장나서 촬영할 기분이 나지 않고, 이것저것 신경 쓰다보니 여력이 없어 스스로 즐기지 못하는 여행이 되고 있다.
구시가로 다시 오는 길이 고단했으나, 피자리아를 발견하자 재빨리 마르게리타 피자를 포장 주문했다.
게다가 내친 김에 더 움직여-다리 아픈거 맞나-서 현지인 추천 젤라또가게인 Vovoli 매장에 앉아 쌀맛 젤라또까지 먹었다.
Vovoli에서 멀지 않은 산타크로체 성당 앞에선 광장을 막아두고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돌아오는 길에 가죽 상점에 들러 친구들은 가죽 제품을 구입하고, 또 마트에 들러 맥주와 콜라를 골랐다.
숙소로 들어가다 슬쩍 바라본, 두오모 쿠폴라를 쳐다보는 브루넬레스키의 눈빛은 강한 집념과 깊은 긍지로 빛나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마르게리타 피자에 맥주와 콜라가 식사 거리가 돼 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자정이 넘어도 다채로운 레퍼토리는 끝없이 한없이 이어지고 있다.
내일은 드디어 베네치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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