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현지인의 비양심과 무질서가 판치는, 이탈리아 수도인 '로마'라는 도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에 살던 2006년과 2008년 그리고 코시국 직전인 2020년 1월에 이어 이번이 4번째 방문이다.
여행지에선 늘 현지인의 문화와 생활에 집중하지만, 로마에서의 내 관심사는 고대 유적 및 르네상스 바로크 예술작품들이다.
밤새 2시간 정도만 잤을 뿐 내내 뒤척였고 새벽에 눈을 떴다.
어차피 시차 적응이 안되어 일찍 일어났으니 우선 테르미니역 마트 Conad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숙소 앞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사진을 찍으려다 살짝 자빠졌는데, 들고 있던 미러리스카메라가 바닥을 찍으며
튀어나온 렌즈로 나를 보호-디카가 아니었으면 내가 다쳤을 수도-해 주더니, 그때부터 렌즈가 움직이질 않는다.
그리하여 여행 2일차 사진부터는 모두 핸드폰으로 촬영한 것들이다.
물과 식료품 구입을 위해 테르미니역 마트를 오가는 데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벌써 힘드네.
한식으로 아침을 챙겨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다보니 10시, 나갈 시간이다.
Vittorio Emanuele역에서 지하철 A선을 타고 Spagna역에 내리면 첫 행선지인 스페인 광장이다.
5월, 평일, 오전 10시반. 이 시기에 여행객이 이렇게나 많을 일인가.
영화 '로마의 휴일'이 만든 최고 명소이자 근사한 조각배 분수가 있는 스페인 광장은 명품 거리인 콘도티 거리로 이어진다.
스페인 광장 앞 콘도티 거리로 들어선 우리, 헤매기 시작한 건 이 때부터다.
구글맵이 요상하게 반응하더니 트레비 분수 가는 길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체력만 있다면야 곳곳에 산재한 유적 보는 재미가 있어서 얼마든지 헤매도 괜찮지만, 우리 체력은 믿을 바가 못된다.
트레비 분수를 찾아가는 길, 유럽이 처음인 친구들은 로마의 거대한 건축물에 감탄을 자아낸다.
18C에 만든 트레비 분수도,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 2C에 건립된 하드리아누스 신전도 모두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란다.
판테온 앞은 대기줄이 매우 길었으나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입장했다.
무료입장이지만, 예전과는 달리 주말엔 인터넷으로 입장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부관이자 사위인 아그리파가 건립했고 이후 건축왕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126년에 재건한 판테온엔 과학이 숨어있다.
천장 5열의 동심원은 5개의 천구인 우주를, 각 열마다 음각된 28개의 격자는 음력으로 한 달을 의미하며, 판테온 내부에 있는 7개의 벽감은
고대에 관찰 가능했던 해와 달과 다섯 개의 행성-화,수,목,금,토성-을 의미한다.
로마 건국일인 4월 21일 정오엔 지름 9m짜리 천장 구멍인 오클루스를 통해 사선으로 내려온 햇빛이 판테온의 출입문과 합치되는데,
로마 황제들은 매년 4월 21일 판테온 앞에서 로마의 탄생을 축하하고, 자신의 권위를 표현한 행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로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한 산 루이지테이프란체시 성당은 판테온과 나보나 광장 중간에 있다.
이곳의 여러 경당 중 콘타렐리 채플의 벽면을 장식하는 그림은 화가 카라바조의 3부작인 "마태오의 소명, 마태오의 영감(마태오와 천사),
마태오의 순교"다.
빛과 그림자의 극적 구성 및 사실적 표현 기법으로 근대 사실주의 회화를 탄생시킨 카라바조는 "마태오의 소명"에서 화면의 빛과
자연의 빛이 만나는 신비로움을 표현했다.
맨눈에 비친 이 회화들은 정지된 그림이 아니었다.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격렬하고 치열하게 빛을 조종한다.
우피치에서 보았던 카라바조의 그림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격정적이다.
나보나 광장-고대 경기장-의 4대강 분수 주변에선 이탈리아 TV 프로그램 촬영 중인가 보다.
촬영지 근처에 오지 말라면서 스탭들이 사람들을 자꾸만 밀어낸다.
공공재인 광장에서 인기 건축물로부터 여행객을 몰아내면 대체 우린 뭘 봐야 할까.
포세이돈 분수 앞에서 올려다본 나보나 광장의 하늘이 매우 흐리다.
나보나 광장에서 캄피돌리오 광장 가는 길에 숙소 호스트가 추천해 준 피자리아가 있다.
쫄깃한 도우가 특징인 나폴리식 피자라는데, 1인 1판씩 주문했더니 1판을 혼자 다 먹기엔 좀 많다.
그럭저럭 괜찮은 맛. 기대 없이 먹으면 쓸만한 맛이다.
처음보다는 나아졌지만 구글맵이 완전히 친절해지지는 않았다.
여행지에서 구글맵으로 길찾기-담당자인 남편에게 감사-를 해본 적이 별로 없다 보니, 이번에 구글이와 친해지기까지 꽤나 애를 먹었다.
게다가 로마는 지하철 노선이 적고 명소 간 거리가 짧아서 도보로 다닐 수밖에 없는데, 이틀에 나눠봐야 할 것들을 하루에 다 소화하려니
다리는 물론 벌써 온몸이 뻐근하다.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에 오르고, 근처에서 로마 건국 신화를 형상화한 늑대와 로물루스 레무스도 만났다.
힘들지만 즐거워하는 친구들, 우린 로마 역사의 여러 장을 잘 훑고 있는 중이다.
포로로마노를 찾아가는 길, 또 살짝 헤맨다. 오늘은 첫날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자기합리화.
리스본 여행 중이던 30일 온라인으로 콜로세움 입장권을 겨우 예약했는데, 포로로마노와 팔리티노언덕 입장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육신은 소중하기에 팔리티노 언덕은 당연히 패스다.
포로로마노는 왕정, 공화정, 제정을 거치는 1000년 동안 그야말로 로마의 수도였던, 모든 분야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돌무더기로만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알고 보면 그 속에 역사가 있고 스토리가 있다.
우린 공공기록보관소부터 둘러보았는데, 내게 가장 인상적인 건축물은 안토니우스 피우스 신전이다,
기둥들이 성당을 품고 있는 형태의 안토니우스 피우스 신전은 로마 5현제 중 4번째 황제인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와 아내를
신격화하기 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건축하여 헌정했다.
선대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기에 너무 어려서, 안토니우스를 양자로 들이면서 안토니우스가
마르쿠스를 양자로 들여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마르쿠스를 황제로 만들기 위한 징검다리였으나 안토니우스 황제는 높은 덕성을 지니고 기대 이상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1150년에 카톨릭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포로로마노 입장엔 정해진 시각이 없지만 콜로세움은 예약한 그 시각에만 입장할 수 있다.
혹시 30분 전에 입장 가능할까하여 QR과 바코드가 인쇄된 프린트를 내밀었으나 나중에 오란다.
정해진 시각 15분 전인 오후 4시 50분, 드디어 콜로세움에 들어간다. 난 이번이 3번째 입장인데, 콜로세움은 늘 굉장하다.
콜로세움은 서기 80년에 정치적 계산이 만든 고대 건축물, 5만 명을 수용했던 시민들의 놀이터, 기술과 과학의 집약체, 중세에 버려졌다가
재탄생한 로마 최고의 랜드마크다. 폐장 시각까지 2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콜로세움 내부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고대 역사 속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다.
3년 전과는 달리 입장이 차단되고 제한된 곳이 많아서, 걷다가 둘러가야 하는 일이 여러 번 생기니 살짝 짜증스럽다.
게다가 3층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 듯하더니 사라진 친구들. 얘들아 어디에 있니, 로마에서 로마로 전화를 해야 하니.
흐린 하늘 아래 잠시 햇살이 비추고, 콜로세움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베누스 로마 신전을 향한 최고의 전망을 선사한다.
지하철 Colosseo역에서도 트래블페이카드는 탭투탭으로 승차가 가능하다.
Termini역에서 어렵게 Coop을 찾아 오렌지와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구입한 후 오후 7시반 숙소로 돌아왔다.
대단한 역사 순례를 한 날, 로마의 핵심 명소만 돌아다녔어도 정말 많이 걸었다.
허리와 다리, 발은 물론 발가락까지 아프고 절로 눈이 감긴다.
내일은 바티칸 투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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