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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4 베니스·로비니·비첸차

4월 6일 (토) : 스콜라 산로코의 틴토레토

새벽 2시에 깨어 두어시간 뒤척이다 7시에 기상하는 시차부적응은 오늘도 이어진다. 

검은곡물빵, 계란프라이, 버섯버터구이, 샐러드, 우유, 살구주스로 조식을 챙겨먹고 나갈 준비를 하던 8시반, 초인종이 울렸다.

쓰레기와 재활용품 내어놓을 때를 알려주기 위해 청소미화원이 울리는 벨소리다.

 

The Migrant Child by Banksy
The Migrant Child by Banksy

'스콜라그란데 디 산코로'로 향하는 아침 9시, 2019년에 뱅크시가 그려놓은 ' The Migrant Child'를 만났다.

물과 바람에 씻겨 많이 옅어졌지만 벽화 속 아이의 눈빛과 애절함은 옅어지지 않았다.

 

스콜라 그란데 디 산로코(왼쪽)와 산로코 성당(오른쪽)
스콜라 그란데 디 산로코 Scuala Grande di San Rocco

오픈 시각-9시반-보다 일찍 다다른 Scuola Grande di San Rocco 앞엔 이미 입장 대기자들이 많다. 토요일이라 그런가.

그러나 스콜라 산로코의 출입문은 약속된 오픈 시각을 넘겨 9시 40분에야 열렸고 실제 입장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다.

 

스콜라그란데-大Scuola-는 베네치아 카톨릭교회 각 교구의 일반 남성 신도들의 친목 단체다.

길드나 小스콜라와 달리 직업과 관련없이 구성되었고 귀족 남성도 참여는 가능하나 대표나 임원을 맡는 것은 불가했다.

1478년에 결성된 스콜라 그란데 디 산로코는 전염병의 피해를 막고 돕기 위해 자선단체 겸 병원으로 설립되었는데, 산로코-또는 산로크-는

흑사병 치유의 수호성인 이름이다.

 

스콜라그란데 디 산로코 아래층
스콜라그란데 디 산로코 아래층

스콜라그란데 디 산로코는 통일성 있는 내부 장식을 원했고 작업할 단 한 명의 화가를 선택하기 위해 공모전을 개최했다.

공모전에 참가할 화가는 스콜라산로코 회의실 천장화의 스케치을 제출해야 했는데, 티치아노는 베로네세를 내세워 틴토레토를 견제했다.

처음에 티치아노 화실에서 일했으나 갈등 끝에 쫓겨난 야코포 틴토레토는 이후 티치아노로부터 직간접적인 방해를 받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구도와 티치아노의 색채를 따르고자 했던 틴토레토는 베네치아 모든 건물에 자신의 그림을 걸고 싶어했다. 

 

그런데 작업 속도가 남달랐던 틴토레토는 몰래 회의실에 들어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천장에 부착한 후 그림 기부를 선언해 버린다.

기증품 거절 불가의 스콜라 규약을 편법으로 이용한 것인데, 최종적으로 스콜라산로코 작품 제작은 틴토레토가 맡게 되었다.

기증한 천장화가 매우 훌륭했기 때문이었고 이후 회의실 천장의 나머지 부분은 대가를 받지 않고 무료로 완성해 준다.

틴토레토는 1564년부터 1588년까지 스콜라그란데 디 산로코에 50개 넘는 작품을 남겼다.

 

입구로 들어서서 밝지 않은 실내에 걸려있는 대형 그림을 본 순간, 깊은 탄성이 연이어 절로 나온다.

바실리카 양식의 아래층엔 2열 기둥이 늘어서 있고 좌우 벽면엔 성모마리아의 생애 연작 8작품이 그려져 있다.

 

아래층. 성모마리아의 생애 : 수태고지 422×545cm (세로*가로)
아래층. 성모마리아의 생애 : 동방박사의 경배 425×544cm
아래층. 성모마리아의 생애 : 이집트로의 피신 422×580cm

'수태고지, 동방박사의 경배, 이집트로의 피신, 무고한 학살, 성모승천, 이집트의 성모마리아, 막달라 마리아'(1582-1587) 등을 주제 삼은

틴토레토의 회화엔 독창성 있는 구도와 배치, 역동적인 구성과 극단적인 명암법이 아낌없이 나타난다.

15세기 조반니 벨리니를 시작으로 16세기 조르조네와 티치아노로 이어진 베네치아화파는 16세기 중후반 베로네세와 틴토레토에 이르는데,

나는 화려한 색감이 드러나는 티치아노나 베로네세 그림보다 명도 낮고 드라마틱한 표현을 즐기는 틴토레토를 더 좋아한다

 

아래층. 성모마리아의 생애 : 성모승천 425×587cm
성모마리아의 생애 : 할례 440×482cm 그리고 위층으로 가는 계단
위층으로 가는 계단

위층을 향해 계단을 오르면서 커튼 사이로 보이는 천장과 벽면의 모습은 감탄사를 연발할 만큼 엄청나고 대단하다.

스콜라 산로코 회원들만의 공간이었던 위층에서는 기둥이 전혀 없는 대형홀을 먼저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총회실이다. 
금빛 천장은 구약성서의 내용이, 벽면은 신약성서의 주요 장면이 아래층 못지 않은 크기의 대형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스콜라그란데디산로코 위층 : 총회실
스콜라그란데디산로코 위층 : 총회실
스콜라그란데디산로코 총회실 : 산로코(왼쪽)와 산세바스티아노(오른쪽) 각 250×80cm

천장의 세 개의 큰 그림은 약속의 땅을 향한 유대 민족의 여정을 키아로스쿠로-테네브리즘-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베네치아화파의 르네상스 후반을 맞은 틴토레토는 마니에리스모-매너리즘. 왜곡과 변형-와 바로크의 문도 두드리고 있었던 거다.

정면 맞은편 벽면은 흑사병-혹은 전염병- 치유의 수호성인 산로코와 산세바스티아노(1578-1581)가 지키고 있다.

 

위층 총회실 벽면. 신약성서 : 목동들의 경배 542×455cm(세로*가로)
위층 총회실 벽면. 신약성서 : 그리스도의 세례 538×465cm
위층 총회실 벽면. 신약성서 : 그리스도의 부활 529×485cm

총회실 벽면은 신약성서 중 10개 에피소드로 제작했는데 '목자들의 경배, 그리스도의 세례, 부활,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 최후의 만찬,

그리스도의 기적, 승천' 등 많이 알려진 성서 스토리를 표현해냈다.

오, 세상에. 와, 말도 안돼. 이런 공간이라니. 이건 정말 미쳤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아래층의 성모마리아 연작을 보면서 솟아올랐던 감동이, 총회실에선 엄청난 위대함으로 형언할 수 없이 벅차오른다.

 

위층 총회실 벽면. 신약성서 :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538×455cm
위층 벽면. 신약성서 : 최후의 만찬 538×487cm
위층 총회실에서 회의실로 들어가는 출입문 (유화 : 검증의 연못. 그리스도의 유혹)

광활한 총회실 한쪽에 자리한 회의실 천장엔 '영광의 산로코(1564)'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이 회의실 벽면엔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걸작이면서 스콜라산코로의 대표작인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1565)'가 있는데, 복원 중이다.

그림 앞 복원용 설치물엔 실제 작품보다 작은 인쇄본만 걸려 있고 그 옆 화면에선 복원 과정이 동영상으로 상세히 재생되고 있다.

틴토레토 그림으로만 장식된 이 건물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인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가로 길이가 12m가 넘는 대형 벽면화다. 

이 그림을 볼 수 없다니, 아쉽고 또 아쉽다.

 

위층 회의실 천장 : 영광의 산로코 240×360cm
위층 회의실 벽면 :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복원 중). 536×1224cm
위층 회의실 벽면 : 그리스도의 수난(오른쪽부터 빌라도 앞의 예수 515×348cm, 에케호모 260×390cm, 갈보리산의 오르막 515×390cm)

회의실 출입문 쪽 벽면엔 그리스도의 수난(1567)이 표현되어 있다.

'빌라도 앞의 예수, 에케 호모-빌라도가 가시관 쓴 예수를 가리키며 군중들에게 이 사람을 보라-, 갈보리산의 오르막'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잠바티스타 티에폴로, 아브라함과 천사 140×120cm (1743)
잠바티스타 티에폴로, 하갈과 이스마엘 140×120cm (1733)
틴토레토, 수태고지(왼쪽)와 산로코(오른쪽)

계단 있는 별실엔 '아브라함과 천사,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를 다룬 잠바티스타 티에폴로의 그림이 화사히 자리하고 있고

어디선가 뜯어(?)온 틴토레토의 성화-수태고지, 산로코 등-들도 스콜라 산로코에서의 마지막 관람을 빛내고 있다.

토요일이라 생각보다 살짝 관람객이 많았으나 내부를 관람하는 2시간반 동안, 정말 너무나 기쁘고 벅차고 감동스러웠다.

 

산로코 성당

역시 틴토레토의 성화로 가득한, 스콜라 산로코 옆 산로코 성당엔 산로코 관련 그림들이 많다.

흑사병 환자를 치료하는 산로코, 동물을 축복하는 산로코, 사막의 산로코 및 중풍 환자를 고치는 예수, 수태고지 등이 있는데,

공사 중이고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며 스콜라 산로코에서의 성화에 대한 여운이 가시지 않은 터라 산로코 성당엔 들어가지 않았다.

 

San Pantalon 성당
산판탈론 성당
산판탈론 성당

숙소로 돌아가기 전 들러야 할 곳이 하나 더 있으니, 소박한 외관의 산판탈론 성당이다.

17세기에 건립된 산판탈론 성당의 압권은 거대한 천장 프레스코화다. 입체적이고 다이나믹하고 완전히 압도적이다.

 

4월 초인데도 베네치아의 맑은 낮은 햇살이 강하고 기온이 높다.

오늘 점심은 서울서 공수해 온 라면, 역시나 베네치아에서 먹는 최고의 요리다. 

낮눈을 잠시 붙인 후 중년 부부의 평화로운 휴식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산타마르게리타 광장
산타마르게리타 광장

오후 7시, 밖은 아직 밝고 숙소 옆 산타마르게리타 광장엔 사람들-여행객보다 현지인-이 많다.

광장 한쪽 피자가게에서 조각피자를 구입한 10-20대들은 아무렇게나 서서 또는 벤치에 앉아서 간편식을 즐기고 있다.

우리는 마르게리타 피자와 프로슈토풍기 피자를 1판씩 포장했는데 얇고 쫄깃한 이탈리아 북부식 피자가 아주 맛있다.

 

넷플렉스 신작 '기생수' 1편을 피맥과 함께 시작했다. 오호, 흥미롭다.

많이 걷진 않았으나 그림 보느라 오래 서 있다보니 다리와 허리가 유난히 아픈 날.

오늘도 우린 오후 9시에 취침하는 새나라의 어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