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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4 베니스·로비니·비첸차

4월 5일 (금) : 산마르코 그리고 아르세날레

산타마르게리타 광장 : 숙소 앞

두어 번 잠에서 깨다자다를 반복하다가 오전 6시가 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행 첫날부터 베네치아행 항공기 지연과 캐리어 파손 문제로 삐걱대긴 했으나 컨디션이 그다지 나쁘진 않다.

 

공수해 온 한식 거리로 아침식사를 챙긴 후 8시반, 베네치아 본섬 도르소두로 지역에 위치한 숙소를 나섰다.

2004년 7월 당일치기, 2019년 2월과 2020년 1월엔 각 4박씩, 작년 2023년 5월 2박을 했고, 이번 2024년 4월엔 여행의 시작과 끝에

각각 7박과 2박 동안 머물게 되는 베네치아 여행이 난 5번째다. 남편은 2004년, 2019년에 이어 3번째 맞는 베네치아다. 

 

주먹의 다리 Ponte dei Pugni
주먹의 다리 Ponte dei Pugni
4월 8일(월) 관람한 코레르박물관 : 'Ponte dei Pugni'

날이 맑진 않아도 비가 내리지는 않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숙소 앞 드넓은 산타마르게리타 광장을 지나 처음 마주한 운하에서 '주먹의 다리(Ponte dei Pugni)'를 만났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빨리 만나다니, 이야기 있는 이곳이 매우 반갑다.

 

과거 베네치아 본섬에서 사이 나쁘기로 악명 높았던 조선공들과 어부들은 만나기만 하면 주먹을 날리고 패싸움을 했다고 한다.

두 직업군은 이 싸움을 아예 연례 축제로 만들어서 '주먹의 다리'에서 1년에 한번씩 공개적으로 대대적인 싸움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연례 행사가 된 주먹질은 단검까지 끌어들이는 비극을 초래했고 결국 베네치아 정부는 1705년 이후 이 행사를 금지시켰다.

주먹 다짐 축제(?)의 시작 장소인 '주먹의 다리' 엔 스토리텔링을 상기시키는 4개의 발자국이 있다.

 

아카데미아다리 위에서 보이는 대운하
아카데미아다리와 아카데미아미술관
산마르코대성당

베네치아 대운하에서 가장 멋진 광경을 선사하는 아카데미아 다리에 다다랐다.

이곳 명칭의 근거가 된 아카데미아 미술관 앞엔 아카데미아 수상버스 정류장도 멋들어지게 떠 있다.

그러나 대운하에 서린 아침 물안개 때문에 이곳은 숙소 근처보다 더 흐리다.

 

이번 여행의 첫 내부 관람지인 산마르코 대성당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했던 작년 5월과는 달리 산마르코 광장은 여기저기 공사 중이라 잔뜩 어수선하다.

9시반, 대성당 앞 대기줄에서 15분을 기다려 직원이 직접 대행 발급해주는 발매기를 통해 입장권을 받았다.

 

내부공사가 다 완료된 산마르코대성당 전체를, 남편은 관람-그전엔 일부만-하지 않았기에 작년에 관람했던 나도 같이 입장했다.

4월초, 여행 성수기라 할 시기가 아닌 것 같은데, 대성당 내부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복작대는 와중에 어느 채플에선 경건한 미사 중.

 

이 사진만, 2023년 5월 맑은 날의 산마르코대성당
산마르코대성당 : 두 돔 사이 천장 벽과 앱스돔과 제대 스크린(위쪽부터)
산마르코대성당 : 앱스돔과 제대 스크린, 독서대(왼쪽)

흐린 날인데다가 별다른 조명이 없는, 9세기에 처음 건립된 성당 내부가 전체적으로 아주 어둡다.

대성당 안 5개의 돔에는 각각 16개의 창문이 있었고 외벽을 이루는 아치에는 각각 8개의 창문이 있었으나, 모자이크 장식을 위해

창문을 막거나 창 크기를 줄여 벽을 늘렸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도 비잔틴 황금색 모자이크는 은은히 빛난다.

 

섬세함이 살짜기 결여된 모자이크화는 프레스코화나 유화보다 카톨릭적 의미나 줄기를 알아채기가 어렵다.

흐린 하늘로 인해 더 어두운 내부, 천장과 높은 벽면에 주로 배치된 수많은 모자이크, 게다가 얕은 종교 지식까지 더하니 어떤 스토리인지

무슨 에피소드인지 단번에 알기 쉽지 않다. 

 

중앙 돔과 앱스 돔 사이 벽과 천장에는 수태고지, 동방박사의 경배, 성전 봉헌, 그리스도의 세례와 변용이 표현되어 있다.

제대 뒤 앱스 돔에는 그리스도가, 주변엔 성모마리아와 구약 예언자들이, 펜던티브-돔 주변 삼각공간-에는 4대 복음사가의 도상이 있다.

중앙 제대 앞 제대 스크린 위에는 십자가 및 성모마리아, 산마르코, 12사도 조각상들이 장식되어 있고, 앱스 돔 뒤쪽 금빛 모자이크는

Pantocrator-우주의 지배자, 전지전능한 그리스도-를 표현했다

 

산마르코대성당 중앙돔 : 예수의 승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산마르코대성당 : 성 안드레아

중앙 돔엔 승천하는 예수를 중심으로 성모마리아, 천사들, 12사도가 있으며 펜던티브엔 4명의 복음사가들이 복음서를 들고 있다.

예수의 생애, 성서의 내용, 카톨릭 성인 등으로 장식된, 여전히 금빛으로 빛나고 있으나 작년 같은 경탄은 사라진 대성당 내부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최후의 만찬 후 올린 애끓는 기도. 세 제자는 잠들고, 새벽에 유다가 데려온 로마병사들에게 체포됨.-와

성 베드로의 동생이자 X자 십자가에서 순교한 성 안드레아를 찾아낸 건 그나마 행운이었을까.

 

산마르코대성당 정면 파사드 아래쪽아치1 : 산마르코 유해를 돼지고기로 덮어서 빼돌림

산마르코대성당 정면 파사드 아래쪽아치3 : 도제의 산마르코 유해 경배와 산마르코성당 건립 결정
산마르코대성당 정면 파사드 아래쪽아치4 : 산마르코성당 건립 및 산마르 유해 안치

구약성서를 새긴 대성당 앞 회랑-나르텍스-은 드나들며 그저 보기만 한다. 

어두운 성당 내부를 나와 다시 바깥이다. 다행히 베네치아의 하늘은 푸른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산마르코 대성당 정면 파사드 아랫부분엔 5개의 아치마다 출입문이 있다.

5개 아치 중 중앙을 제외한 아치 4곳에, 산마르코 유해를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베네치아로 옮겨오는 과정이 표현돼 있다.

이야기의 순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데, 마지막 모자이크만 13세기것 남아있고 나머지는 17세기 것이다.

 

파사드 꼭대기엔 성인들의 조각상이, 파사드 윗부분 5아치 중 4개 아치엔 예수의 고난과 승리를 나타낸 모자이크가 있다.

왼쪽부터 십자가에서 내려지심, 부활, 승천 등을 표현했고 이 모두가 아랫부분 중앙 아치의 '최후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산마르코대성당 정면 파사드 위쪽아치
산마르코대성당 정면 파사드 아래쪽아치 중앙 : 최후의 심판
날개 달린 사자(산마르코. 현 수호성인)와 산테오도르(전 수호성인)

대성당 내부에 오래 머물진 않았으나 어둠 속에서 에너지 소모가 많았는지 기가 다 빠진 느낌이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피아제타의 두 기둥 위엔 현재와 과거의 수호성인 산마르코와 산테오도르가 도시를 지키고 있고

넓디넓은 운하 건너 저편엔 산조르조마조레섬과 이번 여행의 마지막 숙소가 있는 주데카섬이 가물거린다.

 

산자카리아성당
산자카리아성당
산자카리아성당 : 조반니 벨리니, 자카리아의 성모

산마르코에서 멀지 않은, 내부가 회화로 뒤덮인 산자카리아 성당까지 걸어간다.

조반니 벨리니의 제대화-자카리아의 성모-가 있는 이곳은 어떠한 미술관보다 멋스럽고 근사하다.

그림은 역시 처음부터 있던 원래 자리에 있어야 더욱 아름답다.

 

작년 4월과 5월에 포르투갈과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는 그렇지 않았으나 이번엔 가는 도시마다 학생 단체여행객이 아주 많다.

다양한 언어를 내뱉는 많은 학생들이 인솔교사를 따라 수학여행이나 현장체험학습 중인 듯한데, 여행객 중 막대한 지분을 차지한다.

푸른 줄무늬가 선명한 그리스 국기가 걸린 산조르조 정교회 앞마당에도 고1쯤 되는 학생들이 무리지어 있었다.

인솔교사의 설명을 제대로 듣고 있는 아이들은 1/3도 안되는 듯, 수학여행은 수학(修學)은 쏙 빼놓은 여행이다.

 

산조르조 그리스정교회
산조르조정교회 : 가운데 액자그림이 성조지
산조르조정교회

산조르조 그리스정교회를 찾은 이유는 '산조르조'라는 이름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의 성당 명칭은 카톨릭 성인을 따서 명명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정교회도 마찬가지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로 순교한 산조르조-성聖조르디, 성조지, 성게오르기우스-는 뛰어난 전투력을 지닌 로마병사였다.

그런데 이후 괴수를 퇴치하고 공주를 구하는 영웅담이 첨가되면서, 말을 탄 채 칼이나 창으로 악룡을 무찌르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조르조 성인은 공주나 양, 붉은 십자가와 함께 그려지기도 하는데 사수, 군인, 기사단, 조지아, 잉글랜드, 모스크바의 수호성인이다.

예상대로 정교회 외관과 내부에 조르조를 형용한 모자이크화가 많다. 오, 발견의 즐거움.

 

아르세날레(조선소)
아르세날레 무기고

산조르조에서 동쪽으로 500m쯤 움직이면 12세기에 지은, 현재 전시회 및 문화행사장으로 쓰이는 아르세날레-조선소-를 만날 수 있다.

조선소 옆 무기고 앞엔 17세기 아테네에서 약탈해 온 사자상이 디케, 아폴론,  포세이돈, 아테나를 위시한 그리스신들을 지키고 있다.

여행객의 시선에서 살짜기 멀어진, 한적하고 잔잔한 이곳이 참 좋다. 

 

아르세날레
아르세날레
아르세날레 선착장

하루에 걸을 거리를 오전에 다 걸어버렸나, 허리가 아프고 다리도 뻐근하다.

다시 산마르코 광장으로 이동해서 시계탑 안쪽 레스토랑에 앉았다. 작년 5월에 친구들과 식사를 했던 곳이다.

작년처럼 세트 메뉴를 주문했는데, 빵과 함께 서빙된 오징어먹물파스타와 해물파스타도 맛있고 깔라마리튀김도 괜찮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니 오후 2시, 이제 푹 쉬어야 할 시각이다.

숙소로 돌아와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는 까무룩 잠에 빠졌다. 시차 부적응 기간이니 지극한 당연지사.

내내 고요하던 오후. 6시 40분쯤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고 출입문 밖에는 10개짜리 롤휴지팩을 든 젊은 남자가 서 있다.

 

어젯밤 늦게 셀프체크인한 숙소엔 화장실용 휴지가 단 1개밖에 없었기에 오늘 아침에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7박 동안 롤휴지가 1개만 제공되는 건지, 요청하면 더 주는지 아니면 게스트가 알아서 구입해야 하는지 문의했었다.

여러 차례 메시지가 오갔고, 호스트는 직원 실수라 사과하면서 우리가 숙소에 머무는 시간을 질문-이 메시지는 저녁 늦게 봄-했는데

직원이 직접 롤휴지를 가져온 것이었다.

 

산타마르게리타 광장

해가 지기 시작한 시각이 되어서야 숙소에서 200m 거리에 있는 마트에서 장을 보았다. 

건물 0층과 1층에 자리잡은 Conad는 규모가 크진 않아도 있을 건 다 있고, 게다가 숙소 코앞이라 여행 내내 아주 편리했다.

 

마트를 나오니 밖은 그새 어두워졌고, 숙소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의 철문엔 잠금장치가 채워져 있다.

근처에 카포스카리 대학이 있는 산타마르게리타 광장은 낮은 물론 밤늦게까지도 굉장히 북적거린다.

특히 금요일과 주말엔 새벽까지 소음이 지속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 때문인지 광장과 이어진 골목마다 보안용 철문이 설치돼 있다.

 

검은 곡물빵, 요거트, 우유로 저녁식사를 한 후 내일 계획을 챙기는데 잠이 속절없이 쏟아진다.

베네치아에서의 두번째 날, 내일은 베네치아를 다시 찾은 이유 중 하나인 스콜라 산로코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