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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4 베니스·로비니·비첸차

4월 13일 (토) : 로비니의 노을

6시반에 눈뜬 아침, 오늘도 푸르게 맑다.

카레와 미역국으로 식사를 하고 9시, 상쾌하고 가뿐하게 로비니 산책을 나선다.

 

로비니 시장

어제도 슬쩍 지나쳤던 시장을 오늘도 그저 스쳐지난다. 아침이라 다들 오픈 상태이고 손님은 많지 않다.

가격표 없는 물품에 대해 가격을 묻거나 흥정하며 부대끼는 걸 즐겨하지 않는 난, 시장보다 마트가 편하다.

그러다보니 로비니 시장도 거의 매일 그 곁을 지나갔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로비니 뷰포인트는 시장 부근이자 과거 섬이었던 지역의 동북 방향 바닷가 포구다.

갈매기 녀석들이 부지런한 날갯짓을 하는 이곳에서 로비니 하면 떠오르는 대표 광경을 만났다.

오, 바랜 파스텔톤 집들이 솟아오른 종탑을 감싸안은 정경은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같다.

 

섬 같은 구시가, 발비스 안으로 들어선다. 우리가 크로아티아에 온 건 이번이 3번째다.

빈에 살던 2007년 가을에 북부의 오파티야와 리예카를 자동차로 여행했고 2016년 여름엔 두브로브니크에서 3박 동안 머물렀다.

로비니의 건축물들은 두브로브니크 색감에 베네치아톤을 섞은 느낌이라 할까.

 

오다가다 나타나리란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 빨리 만나다니, 드라마 '디어마이프렌즈' 촬영지가 로비니 구시가에 있다.

완-고현정-과 통화를 하면서도 완이 이미 자기집에 와있는 줄도 모른 채, 완이 온다는 기대와 행복감에 우산을 들고 흥겹게 뛰는 연하-조인성.

연하가 기쁜 마음으로 경쾌하게 걷고 뛰었던 집 앞 골목이 바로 로비니 구시가에 있다.

너무 좋은데, 너무 좋다. 우리 여기 매일 와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디어마이프렌즈 촬영지

로비니 구시가 바닥은 오래되어 닳고 맨들거리는 돌바닥이다.

돌바닥의 낭만을 좋아하는 여행자들도 많으나 우린 오래되어 불친절하고 불편한 돌바닥을 좋아하지 않는다.

울퉁불퉁해서 걷기 힘들고 비 오면 미끄럽고, 기동력이 없는 사람들은 물론 유모차나 휠체어도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돌바닥은 구시가 일부에 추억 거리나 포인트로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누구나 다니기 쉬운 보도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빈-비엔나-의 구시가처럼 말이다.

 

구시가 골목도 예쁘고 둘레길 사이로 보이는 바다 풍경도 멋스럽다.

오전 산책을 제대로 마쳤으니 이제 숙소에서 쉬고 먹을 시간이 되었다.

치즈파이와 애플파이는 간식으로, 점심으론 해물믹스를 듬뿍 넣은 오동통면을 먹었다. 대한민국 라면 맛은 역시 유럽에서 극대화된다. 

 

로비니 구시가에서 버스터미널 가는 길
로비니 버스터미널

오후 3시, 모레 풀라행 버스 시각을 문의하고 가능하다면 예매도 하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아무리 작은 동네라도 너무 조용하다 싶었는데, 토요일 근무시간이 끝나 사무실과 창구가 닫혀 있다.

사무실 유리창에 도시별 버스 운행시각표가 붙어있으니 월요일 버스 출발시간에 맞춰 터미널로 오면 될 듯하다.

 

이제 구시가 남동쪽 바닷길을 따라 걸어간다.

따뜻한 아니 낮 최고기온 27도니 뜨거운 날, 습도가 낮아서 그늘이나 숙소는 시원하니 다행이다. 

 

바닷가를 한참 걷다보니 현대적인 분위기의 나즈막한 호텔이 등장했다.

독일어를 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캐리어를 들고 호텔 바깥쪽에 대기 중이다. 게다가 D번호판을 단 관광버스가 또 들어온다.

2007년, 로비니에서 멀지 않은 오파티야-로비니 동쪽-를 여행할 때 호텔 주차장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번호판을 단 승용차들이 가득했다.

오파티야는 독일어권 사람들에게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어서 호텔 직원들은 영어는 물론 독일어에도 능숙했었다.

 

커다란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 아래 평화로운 벤치에 앉았다. 

근처 토미마트에서 구입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는 로비니 바다 풍경이 완전 환상적이다.

저기 보이는 2층 유람선 근처에 아까 본 독일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승선 대기 중인가 싶더니 순식간에 유람선은 바다 위에 떠 있다. 

 

오후 7시, 선셋 포인트로 석양을 보러 나섰다. 

한낮의 뜨거움은 숨어버렸고 우린 선선한 바위 위에 앉아 하루의 끝자락을 즐겨본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리는 리코더 소리, 실버커플이 어설프고 서투른 솜씨로 리코더를 꿋꿋하게 합주하고 있다.

저녁 하늘은 맑고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는 노을빛도 참 맑다. 헬리오스의 태양 마차가 떠나고 있다.

 

인위적인 빛을 심어놓지 않았으니 야경이라 할만한 건 없으나 과한 반짝임 없는 은은한 저녁빛이 더 좋다.

노을진 바닷가를 잠시 거닐고 인적 적은 골목길을 오가는 한적함이 참 좋다.

 

바닷길 앞 피자리아에서 피자 1판을 포장 주문했다. 

베네치아식 아닌, 이탈리아 남부 피자 같은 마르게리타가 아주 맛있다. 치즈가 풍성하고 도우는 쫄깃했다.

근데, 피맥하기 바빠 사진도 안 찍고 게다가 촬영 안한 것도 아주 나중에 알았다는 사실.

 

오늘, 로비니의 노을이 참 아름다웠다.

우리 삶의 노을은 더 갸륵하고 더 기특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