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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4 베니스·로비니·비첸차

4월 14일 (일) : 아드리아해 유람기

일요일 오전 7시, 잠에서 깨자마자 옷만 후딱 챙겨입고 바다로 향한다.

오늘도 맑고 푸른 날. 이른 아침이라 거리는 인적 없이 그저 고요 자체다. 

적막감만 흐르는, 이제는 완전 익숙해진 길을 천천히 걸으니 마음이 평온하다.

 

아침부터 서두른 이유는 일출 드러나는 맑은 날에만  볼 수 있는 그림 같은 절경 때문이다.

아침 해에 싸인 로비니 구시가 그리고 그 모습이 고스란히 비치는 잔잔한 바다, 눈앞에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정경이 펼쳐졌다.

꿈처럼 몽롱하게 구시가와 바다와 그 주변까지 황금빛으로 물드는 풍경이라니, 이 모습 보러 나오길 정말 잘했다.

 

30분간의 짧은 산책을 마친 후 주어진 아침 메뉴는 즉석된장국과 완벽하게 맛있는 대구조림이다. 

식후엔 베네치아 라이브 유튜브를 보면서 베네치아의 기억을 떠올리고 곧 다시 갈 베네치아-이번 여행의 시작과 끝-를 계획했다.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환희와 낭만이 흐르고 현실이 되면 활력과 동력이 넘친다.

 

'인생은 아름다워 ost' 연주 중

다시 구시가로 나온 10시 20분, 예정엔 없던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나는 직접 겪은 적은 없으나 물에 대한 두려움-트라우마-이 있어서 바다나 호수에서 배 타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하늘이 푸르고 파도가 잔잔하니 유람선 타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이긴 하다.

 

바닷가에는 호객 안내 중인 유람선 업체가 많았고 우린 운행할 실물 배를 확인한 후 가장 큰 유람선을 골라 티켓을 끊었다.

유람선 티켓은 오후보다 오전 출발편이 저렴했는데, 업체들마다 비슷한 출발 시간대엔 동일한 가격을 책정해 두었다.

승선까지 여유가 있어서 동네를 돌아다니는 중 어느 레스토랑에서 감동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주제곡을 연주하고 있다.

 

유람선

11시 15분 승선이 시작되고 화창한 휴일이라 승객들이 많다. 

11시 30분에 출발한 유람선에 우리 말고는 동양인은 하나도 안 보인다.  

크로아티아어에 이어, 영어 안내 없이 나오는 독일어 방송이 신기하고 낯설다. 

 

유람선은 옛날에 섬이었던 구시가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유람을 시작했다.

구시가 북동쪽 바다로부터 점차 서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푸른 아드리아해를 항해하고 있다.

에우페미아 성당과 종탑을 중심으로 주변 경관이 어우러진 경치는 어느 방향에서 보든 형언할 수 없이 멋지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이 환상적이다. 

 

유람선은 로비니 구시가 남쪽 바다를 향해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인다.

구글맵을 확인하니 이곳도 행정 구역은 로비니인가 보다. 근데, 날씨 너무 좋다.

배는 국립공원이라 쓰인 지역을 지나고, 크고 작은 섬들 옆도 유유히 지나간다.

 

햇살은 강하지만 바다 바람은 서늘하다.

육지에서 멀어져 망망대해에 이르니 가끔씩 나타나는 섬 하나, 배 한 척이 반갑기 그지없다.

우린 6인 테이블 안쪽에 마주보고 앉아있고 옆에 크로아티아인인 듯한 부부와 아기가 앉아있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야외 뱃머리로 이동했다.

우리 뒤쪽엔 능숙한 독일어를 내뱉는 노부부가 안온한 표정을 지으며 항해를 즐기고 있다.

 

1시간 10분 동안 이스트라 반도 서쪽의 아드리아해에 마음을 담갔다.

이렇게 멋진 날, 이리도 찬란한 바다를 직접 볼 수 있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로비니 버스터미널(좌)과 항해 중인 유람선(우) 위치. 붉은 선은 로비니 구시가(과거 섬)

어젯밤에 포장해 왔던 나폴리식 마르게리타 피자가 점심 메뉴이고 오늘은 2판을 주문했다.

이곳 직원들은 다 이탈리아인이며 피자리아 벽면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이탈리아 배우라고 한다.

낮 1시, 예쁜 숙소에서 낮 맥주와 함께 먹는 마르게리타는 최고였다.

 

숙소에서 휴식 중, 22일부터 2박을 할 베네치아 주데카 숙소-여행 마지막 숙소-에서 메시지를 보내왔다.

요청대로 셀프체크인에 필요한 사본파일과 인적사항 등을 이메일로 전송했다.

 

오후 5시, 발비스아치 안쪽의 바다 둘레길을 발 가는 대로 걷는다.

오늘 최고기온 28도. 햇살은 뜨거워도 안쪽 그늘길은 아주 시원하고 매우 멋스럽다.

 

바다와 이어진 둘레길을 가다보면 건물 사이로 좁은 아드리아해가 선물처럼 나타난다.

평일엔 옷가게 등의 샵이 들어선 곳들인데, 일요일엔 영업을 하지 않으니 여유롭게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이틀 전 영화를 촬영하던 에우페미아 근처 전망 좋은 그곳도 파란 하늘 아래 아주 한적하다.

 

에우페미아 성당 부근

1시간쯤 걸었나보다.

로비니 여행에서 산책은 일상이 되었다.

오후 7시, 남편이 고른 저녁 메뉴는 유럽 으뜸 음식인 라면이다.

 

실내가 서늘해서인지 바닷가라서인지 아침에 세탁한 빨래가 제대로 안 말랐다. 

습한 것도 아닌데 빨래 건조가 늦은 이유가 뭘까. 우리도 현지인들처럼 창문 밖 빨랫줄에 옷을 널어야 하나.

 

또 '감빵생활'을 보면서 내일 갈 '풀라'를 훑어보았다.

예전엔 파워 J였던 성격이 나이들수록 점차 헐겁고 느슨해져 간다.

여행 와서 처음으로 자정 넘어 잠든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