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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4 베니스·로비니·비첸차

4월 12일 (금) : 성 에우페미아 이야기

숙소 건너편 집

너무너무 오고 싶었던 로비니에서의 푸르디푸른 첫 아침이다. 

편안한 숙면을 취하고 7시에 기상했으니 유럽 시각 적응 완료다.

곡물빵과 치즈, 계란프라이와 버터호박구이, 주스, 커피, 요거트, 푸딩을 식탁에 올려 알찬 아침식사를 했다.

 

시계탑 앞 광장 : 공사 중
발비스 아치

오전 9시반, 온통 공사판이라 어수선한 시계탑 앞 광장을 스쳐 발비스아치로 향한다.

1679년에 세워진 발비스아치 자리는 예전에 섬이었던 지역 초입으로, 맨 위엔 베네치아 수호성인 날개달린사자-산마르코-가 부조되어 있고,

아치 바로 위엔 독특하게도 터번 두른 이슬람인-로비니는 이슬람이나 투르크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음-이 장식되어 있다. 

 

로비니의 시작은 7세기로 볼 수 있고 당시 비잔틴 통치하에 있었다고 한다.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독립적인 자치 정부가 있었으나 13세기부터는 500년 이상 베네치아공화국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 로비니 인구는 14000여명 정도라고 한다.

 

발비스아치로 발을 들이면 비탈 완만한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오래된 돌바닥으로 이뤄진 골목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샵이 있고, 방황하는 갈매기와 제집처럼 터를 잡은 고양이도 만날 수 있다.

 

천천히 20분쯤 올라왔을까.

바다 전망이 멋진 곳에 로비니 구시가의 상징, 성 에우페미아 성당과 종탑이 있다.

어찌보면 외관 수수하고 특별할 것 없는 성당보다 로비니 어디서든 조망되는 61m짜리 종탑이 더 근사해 보인다.

 

성에우페미아 성당
성 에우페미아 성당
성 에우페미아 성당 : 중앙제대의 산마르코(좌), 산조지(중), 산로코(우)

성당 터엔 오래 전 성조지 예배당이 있었고 950년에 새로운 성당을 지은 기록이 있으며 현재의 성에우페미아 성당은 1736년에 건립되었다.

성당 정면 출입문에 들어서면 성 조지와 성 에우페미아 조각이 장식된 두 개의 성수반이 있고, 성당 중앙제대엔 대리석으로 만든 산 조지,

 마르코, 산 로코 조각상을 세워두었다. 산조지 -조르디, 게오르기우스-는 로마 병사 출신의 성인으로, 말을 타고 칼이나 창을 지닌 채

악룡과 싸우는 모습으로 주로 표현되고 산마르코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 산로코는 전염병 치유의 수호성인이다.

 

성녀 에우페미아는 소아시아 칼케돈 출신으로, 290년경 귀족 가문에서 테어났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로 307년경에 순교했다.

태형, 바퀴 고문, 화형 등 온갖 고문과 형벌에도 죽지 않자 야생동물-곰 또는 사자-에게 던져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성 에우페미아 조각상
성 에우페미아 석관을 옮김
성 에우페미아 석관과 순교

성당 중앙제대 오른쪽에는 로비니 수호성인 에우페미아 제대가 있는데, 에우페미아 조각상의 손엔 순교와 천국을 상징하는 종려나무가지가

들려있고 그녀가 고문 당했던 쇠갈퀴바퀴도 조각되어 있으며, 제대 안쪽에는 에우페미아의 유해가 안치된 석관이 놓여있다.

석관 양쪽 벽면에는 800년 로비니 해안에 나타난 석관을 두 마리의 소-에우페미아 목소리가 들리면서 방법을 고지함-로 끌어 옮기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과 사자-야생돌물-에게 물려 순교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성당 내부는 소박했고, 카톨릭성인 목록에서 설명하는 에우페미아는 가볍고 단출했으나 로비니에서 에우페미아 스토리는 길고도 애절하다.

 

성 에우페미아 성당
영화 촬영 중
영화 촬영 중

성당 앞에서 보는 바다도 멋있지만 해안 따라 걷는 바다는 더 멋있다.

바다 벼랑에 붙은 하얀 집 앞에서는 음악과 음향과 음성이 번갈아 또는 동시에 나오고 있었는데 오, 영화 촬영 중이란다. 

 

하늘도 푸르고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바다는 더 푸르다.

바다 뷰를 만끽하며 끝없는 감탄을 쏟아내며 내리막길을 가볍게 걸어간다.

타원형 섬-과거엔 진짜 섬-처럼 생긴 이곳의 둘레는 다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 눈에 보이는 풍경이 모두 그림 같다.

 

경사로를 내려와 바다와 항구가 있는 평지에 다다랐다. 낮 기온 24도, 햇살이 뜨겁다.

해안가 카페에서 사람들은 당당히 볕을 즐기고 포구에는 빛바랜 파스텔톤 건물들이 운치 있게 늘어서 있다.

그리고 포구 앞에서 마주한 모습, 종탑을 중심으로 섬처럼 떠 있는 정경은 우리를 로비니로 이끈 매력적인 경치 중의 하나다.

 

어느덧 정오. 바다 근처에 시장이 있어 들렀는데, 과일 채소 가게는 거의 파장이고 캔이나 병조림, 와인 가게만 열려있다.

게다가 실내에 들어선 상점에서 판매하는 육류와 해산물은 말도 안되게, 이해할 수 없이 비쌌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로비니는 도시 전체 중 구시가이고 주로 여행객이 소비하는 고물가 지역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빈의 구시가 옆 나슈마크트가 땅값 비싼, 여행객 대상 시장이다 보니 현지인 재래시장이나 일반마트보다 비싼 것과 같은 상황이다.

 

숙소로 돌아와 라비올리와 볶음김치로 점심식사를 하고, 쭉 휴식 시간이다.

오전 내내 옹골차게 학습하고 부지런히 돌아다녔으니까, 잘 쉬어야 다음 동력이 생기니까 말이다.

 

크로아티아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병기
숙소 앞 골목길
구시가 근처 대형마트

숙소에서 500m거리에 대형마트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오후 4시반, 그곳으로 움직인다.

살짝 돌아가는 길, 자그마한 성당 앞 안내판엔 크로아티아어와 이탈리아어에 독일어까지 병기되어 있다.

구시가를 조금 벗어난 대형마트엔 Konzum에선 볼 수 없는, 우리가 원하는 식료품들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직원이 추천하는 스테이크용 쇠고기는 물론 대구, 해물을 장바구니에 넣었고 후추, 버섯, 땅콩, 치즈, 맥주, 빵도 챙겨 담았다.

 

양파와 버섯 곁들인 남편표 스테이크가 썩 괜찮다.

맥주를 곁들인 슬기로운 감빵생활 2회차도 무척 괜찮다.

바다와 성에우페미아를 만난 로비니의 둘쨋날은 더없이 아주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