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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4 베니스·로비니·비첸차

4월 22일 (월) : 다시 베네치아 주데카

오늘은 이번 여행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인 베네치아로 가는 날이다.

아침 6시도 되기 전에 눈이 떠졌고, 냉장고에 남아있는 반찬과 간식거리를 다 털어 밥과 후식을 먹고 커피도 마셨다. 

정리를 마치고 짐을 꾸린 후 내다버릴 쓰레기까지 모두 들고는 오전 9시 20분, 마지막 비첸차 산책에 나선다.

 

시뇨리광장 초입의 피아제타 안드레아팔라디오
바실리카 팔라디아나와 피아제타 안드레아팔라디오

이른 아침에 잠시 내리던 비가 그친 다음, 구시가는 부쩍 서늘해졌다.

'코르소 안드레아 팔라디오'라는 거리명처럼 바실리카 팔라디아나 옆 안드레아 팔라디오 조각상이 있는 피아제타-광장으로 연결되는 

작은 공간-의 명칭도 '피아제타 안드레아 팔라디오'다. 

사흘간 꽃으로 덮였던, 오늘은 음습한 시뇨리 광장엔 나흘 전 밤에 우리를 엄습했던 엄청난 광경이 다시 나타났다.

 

시뇨리 광장 : 날개 달린 사자(산마르코)와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살바토르문디) -베네치아공화국 지배의 흔적
바실리카 팔라디아나
로지아 카피타니아토

바실리카 팔라디아나의 열주와 회랑, 높은 두 기둥에 올라선 날개 달린 사자-산마르코-와 살바토르 문디-예수가 손에 천구를 든 모습.

세상을 구원하는 자-, 강렬한 로지아 카피타니아토 등 시뇨리 광장을 둘러싼 멋진 건축물들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게다가 코르소 안드레아팔라디오에서 골목길로 들어서면 팔라디오의 엄청난 궁전들이 한꺼번에 출현하니 경탄은 최고조에 이른다.

 

Palazzo Trissino-Clementi (오른쪽)
팔리디오뮤지엄: Palazzo Barbaran da Porto
팔라디오뮤지엄 입구

Palazzo Trissino-Clementi와 지금은 팔라디오뮤지엄으로 사용되고 있는 Palazzo Barbaran da Porto, 그리고 여러 채로 이루어진

Palazzo Thiene가 같은 거리 또는 같은 블록 안에 자리하고 있어서 정말 경이롭기까지 하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팔라디오 또는 팔라디안 양식의 건축물들이 메인 거리 뿐 아니라 도시 어디든 산재(?)해 있으니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팔라디오뮤지엄(좌)과 Palazzo Thiene(우)
Palazzo Thiene
Palazzo Thiene

비첸차에 머무는 4박 동안 스친 사람들 중 동양인도 드물었지만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독일 코헴처럼 인구 6천명인 도시라면 모를까, 10만명이 사는 프랑스 낭시에서도 본 한국인을, 30만이 사는 비첸차에선 전혀 볼 수 없었다.

비첸차는 건축적인 요소 말고는 관광포인트나 크게 이름난 랜드마크가 없기에 건축에 관심이 없다면 낯설고 생소한 곳이고

특히 아기자기하거나 예쁜 것을 선호하는 성향을 지닌 한국인들이라면 비첸차는 주목할 도시가 아닌 것이다.

 

바실리카 팔라디나아 남쪽에 면한 에르베 광장 근처 1937년에 문을 연 Pigafetta에 앉았다.

Pigafetta 아래 Maison du thé et du café-차와 커피 하우스-라 쓰인 프랑스어 간판을 내걸고, 내부와 진열장은 온통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려진 물품으로 가득하며, 영국작가 세익스피어와의 관련성을 드러낸 작은 카페.

Casa Pigafetta와 아주 가까운 이곳에서 우린 영국 도자기 찻잔에 담겨 서빙되는 근사한 이탈리아 카푸치노를 마셨다. 

 

Pigafetta

오전 11시, 다시 비첸차 숙소다.

10시에 체크아웃해야 하지만 11시까지 캐리어를 맡기기로 했는데, 부지런한 호스트는 이미 딸과 함께 숙소를 청소 중이다.

비첸차 아파트는 지금까지 묵은 아파트 숙소 중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가장 청결하고 정돈 잘된 숙소였다.

다시 시작된 호스트-가장 말 많은 호스트이기도-의 수다를 적당히 갈무리하고 비첸차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역 근처 공원
비첸차 기차역
비첸차 기차역

베네치아에서 비첸차로 올 때처럼 티켓발매기에서 티켓을 구입했다.

복잡하지 않은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다가 너무 추워서 대합실로 이동해서 대기했는데, 기차는 10분 연착되었다.

 

베네치아 가는 기차 안, 베네치아 주데카 아파트의 도시세 결제와 관련하여 숙소 측에서 오늘 아침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었기에

메시지로 문의하니 내 이메일 주소로 아침에 링크를 보냈다고 한다. 며칠 전, 주데카 숙소 측에서 도시세 결제 문제로 내 신용카드 번호를

묻는 메시지-이런 경우 처음-를 보냈었고, 난 절대 내 카드번호를 알려줄 수 없으며 다른 방법으로 결제하겠다고 했었다.

 

에어비앤비나 부킹닷컴에서 아파트를 예약하면 유럽 다른 나라 숙소들은 대체로 세금까지 포함하여 숙박비를 계산하고 제시하는데 비해

이탈리아 숙소들은 도시세를 별도로 결제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로비니를 제외한 베네치아, 비첸차 모두 도시세 별도 결제였다.

결코 저렴하지 않은 도시세를 숙박비에 포함시키면 호스트가 납부해야 할 세금이나 비용이 많아지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이라

추정하는데, 아무튼 여행자 입장에서는 아주 귀찮고 번거롭다. 

기차 안에서 데이터는 연결 상태가 아주 미약해서 기차가 정차했을 때 겨우 도시세를 결제할 수 있었다.

 

2번 바포레토
2번 바포레토 노선

12시 50분 넘어 도착한 베네치아 산타루치아역에 일기 예보대로 비가 쏟아지고 있다.

비 때문에 같이 움직일 수 없었기에 남편은 운하가 보이는 역에서 짐을 지키고, 난 운하 앞 창구에서 48시간권 바포레토 승차권을 구입했다.

 

2번 수상버스를 타고 산타루치아역에서 주데카로 가는 방향은 처음 가보는 노선으로, 운하가 아니라 바닷길이다.

우린 수상버스에 승차한 지 30분 후, 레덴토레 선착장에서 내려 200m 정도 이동하여 숙소에 도착했다.

주데카 레덴토레교회 서쪽에 자리한 이 아파트는 3층 건물 전체가 한 업체에서 운영하는 숙소로, 리셉션엔 특정 시간에만 직원이 머문다.

공동 출입문과 숙소 출입문은 숙소에서 보내준 설명대로 앱을 설치하여 출입할 수 있는데, 원래 오후 3시인 체크인 시각보다 숙소 측에서

1시간 이상 일찍 앱을 활성화시켜 주었기에 이른 체크인이 가능했다. 도착 전까지 번거로운 일이 많은 숙소다. 

 

숙소 내부는 넓고 고급스러웠다. 거실과 주방이 잘 갖춰졌고 침실과 욕실은 2개씩 마련되어 있다.

주방엔 1.5L 물 2병과 1회용 양념-소금, 후추, 올리브유, 발사믹-과 맛없는 커피캡슐이, 욕실엔 욕조와 샤워부스, 세탁기가 준비돼있다.

 

베네치아 주데카

베네치아 Giudecca에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친다.

베네치아에서 시작하여 베네치아에서 마치는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 2박을 베네치아 주데카에 머물기로 한 이유는 본섬을 마주할 수 있는

바다 때문이었다. 본섬과 바다가 보이는 야외에서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주데카섬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산책도 하려 했다.

 

오후 2시반, 바다가 보이는 주데카의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야외 전망이 끝내주는 식당-바다 보이는 주데카 식당 카페는 모두 전망 최고-인데, 비바람에 오픈 못한 야외자리 때문인지 늦은 오후인데도

실내는 만석이다. 탄산수와 오늘의 해산물파스타, 새우파스타를 주문하자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주인장이 아티초크를 권한다.

뭐 별맛 아닌 건 알지만 안 먹을 이유도 크게 없기에 주인장 웃음을 받은 남편이 ok를 날린다. 

 

아티초크
오늘의 해산물파스타 : 오징어파스타
새우슈피겔파스타

아주 맛난 파스타를 다 먹은 후 다가선 바다에 비바람은 더 강해지고 파도 역시 아주 강력해졌다.

베네치아엘 여러 번 왔지만 이런 날씨는 처음 겪는다. 오래된 내 우산은 강풍을 못 이겨 뒤집혔고 끝내 고장이 나버렸다.

모든 계획을 접고 숙소로 들어가는 수밖엔 없다. 숙소는 비바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 고요했고 게다가 아주 따뜻했다.

 

베네치아 주데카 앞 바다

비첸차에서부터 쌓인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빨래 건조대에 널었다. 

오후 6시, 숙소에서 350m 걸어야 하는 coop엘 가고 싶었으나 엄청난 비바람에 가지 못한 채, 숙소 근처 빈약한 마트-가까이에

이거라도 있는 게 다행-에서 대충 몇 가지 식재료와 간식 거리를 구입했다.

 

피자리아

비바람은 여전하고 바닷물은 주데카를 삼킬 듯 넘실거리고 있다.

오후 6시반, 강풍을 안고 비를 맞으면서 예정했던 피자리아로 향한다.

포장해온 양파피자와 프로슈토풍기피자를 숙소의 우아한 식탁 위에 놓았다. 두 피자 모두 깔끔하게 맛있다.

 

오후 8시반, 넘겨본 창에 빗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숙소 밖 바닷길, 비는 멈추었으나 바람은 여전히 위력적이고 넘실대던 바닷물은 더 출렁거리고 있다.

 

내일, 우리 뜻대로 여행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염려와 기대, 걱정과 바람이 교차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