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 무려 대구조림과 진미채를 올린 서늘한 아침, 서둘러 산마르코 수도원으로 간다.
도미니크수도회 소속 산마르코 수도원은 1433년에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될 때 고액의 금화을 맡겨놓고
귀환한 후 되찾은 사연이 있는 곳으로, 코시모의 지원을 받아 건축가 미켈로초가 15세기에 증개축했다.
현재 산마르코 수도원의 정식 명칭은 산마르코 박물관이다.
오전 8시 오프런으로 입장한 수도원, 주 회랑인 산안토니오 회랑부터 둘러본다.
아래층 회랑 벽면에는 베아토 안젤리코의 대형 프레스코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애도하는 성도미니코'가 그려져 있고
회랑 벽 루네트마다 17세기에 피렌체 화가들이 그린 '산안토니오의 일생'이 장식되어 있다.
산안토니오 회랑과 이어진 실내엔 사제단 회의실, 순례자의 방, 수도원 식당 등이 배치되어 있다.
사제단 회의실 정면은 베아토 안젤리코가 그린 프레스코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와 성인들'로 장식하고 있는데,
푸른색의 배경이 벗겨지고 회적색 바탕이 드러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순례장의 방에는 피렌체의 미술관과 성당, 수도원에서 옮겨온 베아토 안젤리코(1395-1455)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데,
피렌체에서 본 그 어떤 그림보다 선이 곱고 단아하며 색상 역시 화사하게 아름다웠다.
베아토 안젤리코 또는 프라 안젤리코라 불리는 이 수도사의 원래 이름은 귀도 디 피에트로이다.
'천사 같은 수도사(Fra Angelico)'라는 말은 당시 수도사들의 그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고 오랫동안 그렇게 불리었으나
프라 안젤리코가 복자로 추대됨에 따라 현재는 '베아토-복자- 안젤리코'가 더 적절한 표현이라 한다.
아무튼 이 수도사는 기도를 하지 않고서는 붓을 들지 않았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그릴 때면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
또한 한 번 그린 그림은 수정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의 손길이 자신의 붓을 인도해 주셨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한다.
베아토 안젤리코는 1436년부터 10여년간 산마르코 수도원에 머물면서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우피치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고 했으나 그곳에선 볼 수 없었던 '테바이데'가 이 수도원에 옮겨와 있었다.
그리스 테베의 자연을 배경으로 인간의 삶과 수도자의 삶을 함께 묘사했는데, 그림 속 인물들이 속삭이듯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다.
'산마르코 제대화'는 성인들이 성모자를 둘러싸고 대화하는 듯한 '성스러운 대화'라는 구성을 처음 도입한 그림이다.
'최후의 심판'에서는 왼쪽은 구원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모습과 그들이 가는 천국을, 오른쪽은 저주 받은 자들이
지하로 내몰리는 모습과 끔찍한 지옥을 표현했다.
아르마디오 델리 아르젠티-실버캐비넷- 판넬은 산티시마 안눈치아타성당의 메디치 가족예배당 문을 장식했던 그림이다.
수태고지부터 최후의 심판까지 그리스도의 일생을, 36개의 장면으로 나눠 세심하고 섬세하게 표현했다.
작은 공간에 표현한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한 편의 그림처럼 정밀하게 그려졌는데, 색감이 정말 예뻤다.
수도원 식당은 수도원에 딸려있는 숙박시설에 머무는 순례객과 숙박시설 내 의무실에서 머무는 수사들을 위한 장소로,
미켈란젤로의 스승 도메니코 기를란다요가 그린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화가 건물 내부와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오가는 관람객이 드물었던 덕에, 긴 의자에 앉아 마음껏 그림을 즐기는 호사를 누렸다.
산마르코수도원 위층은 수도자들의 방이 있는 공간으로, 오르는 계단에 다가서는 순간 '수태고지'에 압도된다.
베아토 안젤리코의 걸작 '수태고지'는 간결한 구성과 온화한 색감으로 성스럽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오색 날개의 가브리엘 대천사는 우아하게 표현되었고, 푸른 옷의 마리아는 신의 뜻을 따르려는 순종과 의지를 보여준다.
수사들의 방이 있는 위층에는 수도원 회랑을 둘러싼 3면 복도에 44개 방이 있는데, 동쪽에 1~11번과 22~31번, 북쪽에 32~44번,
남쪽엔 12~21번 방이 배치되어 있다. 12~14번을 제외한 모든 방에 수사들의 명상과 참회를 위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일반 수사들의 공간인 동쪽 복도 1~11번 방을 먼저 둘러본다.
한 평 남짓한 좁은 방의 작은 창문 옆 벽면마다 예수의 일생 중 중요한 에피소드가 표현되어 있다.
무신론자인 나는 신화나 성서에서 극적인 이야기, 겹겹의 허구로 둘러싼 이야기, 변신이 포함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첫번째 방부터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중 하나인 'Noli me tangere'-나를 잡지 마라-가 우리를 맞는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두 손을 내밀지만 그리스도는 손을 내저어 그녀를 뿌리친다.
그리스도의 발에는 못자국이 드러나고 풀 위에는 오상을 의마하듯 다섯 개의 선혈을 그려넣었다.
'수태고지' 속 가브리엘 대천사는 마리아보다 더 곱고 아름답게 표현되고, 다소곳한 마리아를 대천사보다 더 아래쪽에 그렸다.
'그리스도의 탄생, 변용, 부활, 성모의 대관식 ,성전 봉헌' 등의 주제를 방마다 1편씩 파스텔톤으로 단아하게 묘사했다.
동쪽 복도 1~11번 맞은편 22~30번 방은 유기서원기-첫 서원을 하고 종신 서원을 하기까지의 기간-의 수사들이 사용했던 곳이다.
예수 공생애의 시작이며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그리스도의 세례'을 비롯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와 성인들' 및
'그리스도의 수난'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베아토 안젤리코가 밑그림을 그린 후 제자들-고촐리 등-이 채색을 했다고 한다.
25~26번 방 사이 복도 벽면에는 '성스러운 대화'가 그려져 있다.
성모자 왼편에는 성모자와 성도미니코, 성마르코 등을, 오른편엔 사도요한, 성라우렌시오, 성베드로 순교자 등을 그려넣었다.
북쪽 복도 31~44번 방은 프레스코화 크기가 대체로 큰 편이고 등장인물과 배경이 상세히 묘사되었다.
'산상 설교, 체포되는 그리스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최후의 만찬,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 등을 그렸다.
북쪽 복도에서 38~39번은 코시모 데 메디치의 방이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39번 방에 그려진 '동방박사의 경배' 속 등장인물은 코시모 데 메디치와 그의 아들 피에로, 손자 로렌초이다.
42번 방의 프레스코화는 그리스도가 숨을 거두자 로마군인 롱기누스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장면을 표현했다.
남쪽 복도의 12-21번은 수련기 수사들이 머물렀던 공간이다.
방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와 성도미니코'를 주제로 여러 기도 자세를 묘사했으며 12~14번은 사보나롤라의 방으로 꾸몄다.
2시간반 가량 차분한 마음으로 성스럽고 경이로운 세상을 거닐었다.
그림을 다 감상한 후 복도에 다시 서니, 신념으로 채워졌던 베아토 안젤리코의 영혼이 벅찬 감동이 되어 일렁였다.
수도원 곳곳에 남긴 아름다운 성화들은 깊은 신심이 아니라면, 자비로운 성품이 아니라면 이루어낼 수 없는 거룩함의 산물이다.
성스러운 세상으로부터 인간 세계로 돌아와 두오모 광장으로 간다.
지난 주에 들어가지 못한 두오모성당에 입장하기 위함인데, 대기줄이 며칠 전보다 훨씬 심각하다.
줄이 외벽을 따라 성당을 거의 한 바퀴 감싸다시피 했으니 최소한 2-3시간은 기다려야 할 듯, 두오모 내부입장은 완전 포기다.
우린 맛있는 젤라또를 먹은 후 오르산미켈레와 시뇨리아광장 근처를 쏘다니다가 후딱 숙소로 돌아왔다.
납작복숭아를 먹으면서 쉬는 도중 흐리던 하늘이 쨍하고 갠다.
오후 2시, 아라비아타소스 넣은 라비올리에 김치와 올리브를 곁들이니, 너무 맛있다.
남편은 낮잠에 빠지고 나는 푹 누워서 허리와 다리를 다독였다.
오후 5시, 중앙시장에 가려 숙소를 나섰는데 캐리어 끄는 젊은 한국인들이 어제처럼 오늘도 여럿 보인다.
알고 보니 숙소의 대각선 방향에 있는 엄청나게 큰 건물이 호스텔이었던 것.
중앙시장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남편을 위해 시장에 왔으나 아래층은 이미 파장-이럴줄앎-이고 위층 푸드코트만 열려있다.
여기 너무 더운데, 에어컨 없이 선풍기의 뜨거운 바람만 오가는 푸드코트에서 무언가를 먹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저녁 피자-이것이 최선-를 먹으려 사흘 전에 들렀던 피자리아에 가보았으나 정기휴무라 닫혀 있다.
오후 7시가 넘은 시각, 맥주에 빵과 모차렐라, 감자칩, 올리브 그리고 달콤한 자두까지 곁들이니 차선책도 매우 훌륭하다.
새나라의 어른이가 돼버린 날, 오늘은 오후 9시에 취침이다.
'표류 > 2024 로마·피렌체·볼차노·빈'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월 22일 (목) : 볼차노에 가면 (0) | 2025.01.09 |
---|---|
8월 21일 (수) : 산타마리아노벨라의 시간 (0) | 2025.01.08 |
8월 19일 (월) : 아레초, 인생은 아름다워 (0) | 2025.01.05 |
8월 18일 (일) : 피렌체 구시가 거닐기 (1) | 2025.01.02 |
8월 17일 (토) : 산티시마 안눈치아타와 산조반니 세례당 (2) | 2025.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