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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4 로마·피렌체·볼차노·빈

8월 24일 (토) : 카레짜 그리고 소프라볼차노

숙소 앞 수전(오른쪽)

그제 밤에 이어 어젯밤에도 숙소 앞 골목길에서 10대들 떠드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예상치 못한 볼차노의 늦여름 더위로, 저녁에도 건물 온도가 내려가지 않았기에 우린 창문을 열어두고 시원하게 잠을 청했다.

그런데 늦은 밤인데도 숙소 앞 좁은 골목에 있는 수전에서 물장난치며 지르는 큰소리에 이틀 내내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물론 창문을 닫으면 완벽하게 소음 차단이 되지만 대신 시원한 대기까지 온전히 차단하게 된다.

그러나 숙면을 해야 하는 우린 어쩔 수 없이 창문을 걸어 닫고 선풍기 바람에 의존하여 다시 잠들 수밖에 없었다.

 

180번 버스
180번 버스

오전 6시, 알람이 울렸고, 환상적인 된장찌개로 이른 식사를 한 다음 어제처럼 오전 8시 전에 버스터미널로 간다.

본래 우리가 아침형 인간이라 여행스타일도 이른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 이전에 마치는 걸 선호하기에 일찍 움직이는 이유도 있으나,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이유는 역시 날씨 때문이다.

8월말인데도 꺾이지 않는 돌로미티의 기온으로 인해 최대한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카레짜호수 가는 180번 버스는 오전 8시 7분, 정시에 출발하고 통로 옆 좌석의 할매할배는 독일어로 조곤조곤 수다삼매경이다.

버스는 여러 개의 터널을 지나 볼차노 남동쪽의 고지대로 향하고, 50분 후 호숫가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 본 풍경

버스에서 내린 그늘, 해발 1520m인 카레짜 호수 주변은 시원하다못해 서늘하고 춥다.

오늘 아침 볼차노보다 해는 기세가 약하고 구름은 드넓게 훨씬 많다.

 

서쪽 돌로미티에는 산에 비해 호수가 상대적으로 적은데, 이 지역에서 알려진 거의 유일한 호수가 카레짜다.

크기는 작은 편이나 호수 빛깔과 주변 경관을 그대로 반영하는 호수 표면이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초입에서 본 호수 주위가 너무 흐리다. 약한 역광에, 구름 더미까지 더해져 기대했던 광경은 보이지 않는다.

 

카레짜 호수 앞 : 역시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병기
카레짜 호수
카레짜 호수 : 오른쪽 드론 (우연히 찍힘)

그런데 호수 초입에서 남부아시아남자 서넛이 한참동안 드론을 날리고 있다.

주말 아침이라 여행객과 시민들이 많았는데, 전망 좋은 자리에서 계속 저러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크지 않게 쫑알댔더니

한참 후 그 중 한 남자, 밝은 표정 지으며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한다.

 

빈에 살던 2000년대 초반에는 유럽에서 한국어를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편히(?) 다닐 수 있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K-pop과 드라마, 영화 등의 영향으로 유럽에도 한국어 능력자가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카레짜 호수 주변
카레짜 호수와 주변
카레짜 호수

카레짜 호수 둘레길을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걸음마다 다른 풍경이 푸르게 또 아기자기하게 펼쳐져서 산책이 즐겁다.

50분쯤 후 다시 돌아온 호수 초입, 카레짜 시그니처 정경인 나무 뒤 병풍 같은 돌산과 하늘은 여전히 뿌옇게 가물거리지만,

호수면엔 나무와 돌산과 구름과 하늘이 기막히게 어우러지고 있다.

 

카레짜 호수
카레짜 호수
카레짜 호수

오전 10시 4분, 볼차노로 돌아오는 180번 버스에 올랐고 몇 정거장 못가 버스는 만석이 되었다.

볼차노 구시가 Despar에서 빵과 과일과 간식거리를 구입하고 12시 20분, 아직 남아있는 맛있는 라면으로 점심을 채웠다.

그리고 오후 1시반, 숙소를 나와 Funivia Renon-Talstation Rittner Seilbahn-으로 향했다.

 

Funivia Renon

오후 일정은 Funivia Renon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소프라볼차노Soprabolzano-오버보첸Oberbozen-로 가서, 레논Renon이라

이름 붙은 두 칸 기차로 종점인 클로벤슈타인Klobenstein-Collalbo콜랄보-까지 갈 예정이다.

케이블카역 명칭이나 동네 명칭이 이탈리아어와 독일어가 혼재되어 있어 헷갈릴 수 있으나 요점은 '케이블카+두 칸 기차'로 이동하면서

경치를 즐기면 된다. 이 교통 수단들도 모두 볼차노카드로 탑승할 수 있다.

 

케이블카에서 본 풍경

케이블카역 Funivia Renon에서 15인승 케이블카에 오른 시각은 오후 1시 48분.

케이블카는 매우 엄청 느리게 볼차노 윗동네인 소프라볼차노로 두둥실 두둥실 올라간다.

이렇게 느리게 작동하는 케이블카는 처음 탑승했는데, 5분 후 산 정상이 보이길래 도착인 줄 알았으나 그곳은 기점이 아니었다.

 

산 정상에 다다른 케이블카는 이제 다른 산을 향해 움직인다.

지금껏 타보았던 경사 따라 오르는 케이블카와는 달리, 수평으로 산을 넘고 건너 이동하는 과정이 정말 무서웠는데,

공중에 매달려 있던 15분 동안 두려움에 떠느라 멋있는 경관을 즐기지 못해 좀 아쉽긴 하다.  

케이블카에서 내리자 역무원이 출구를 막고 서서 일일이 티켓 검사를 했다.

 

Soprabolzano (Oberbozen) 기차역

케이블카에서 내려 Rittner Bahn-Ferrovia del Renon-정류장으로 가니 이미 출발한 기차가 저만치 가고 있다.

케이블카역 주변 평범한 동네를 잠시 둘러본 다음, 15-20분 후 도착한 두 칸짜리 기차의 오른쪽에 앉았다.

 

Rittner Bahn 안에서 본 풍경

프라볼차노에서 클로벤슈타인Klobenstein-Collalbo-으로 가는 리트너반에선 오른쪽 자리에 앉아야 더 멋진 정경을 볼 수 있다.

와, 이게 진짜구나.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15분 가량 전개된 광대한 자연은 정말 멋있고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계속 최악으로 빠르고 크게 독일어로 떠드는 여자가 아니었다면 더 편안했으련만, 그여잔 왜 경치를 마다하고 악을 썼을까.

 

Klobenstein 기차역
Klobenstein (Collalbo)

오후 3시, 기차 종점인 Klobenstein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클로벤슈타인에서 2km쯤 가면 지구피라미드라 불리는 독특한 암석지대가 있는데, 주말이라 버스 배차가 길었고 걷기엔 너무 더워서

가지 않고, 그저 인도 따라 쭉 걸었다. 가다보니 마을의 끝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다.

 

Klobenstein (Collalbo)

이제 어디로 갈까.

Rittner Bahn역으로 돌아가서 기차 타고 또 케이블카 타고 볼차노로 가야겠지 하는데 마침 근처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사실 볼차노·소프라볼차노를 오가는 케이블카가 높은 수평 외줄에서 줄타기 하듯 무서워서 다시 탈 생각에 염려스러웠는데,

볼차노까지 단번에 운행하는 버스가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나 클로벤슈타인에서 볼차노까지 가는 165번 버스는 만만치 않았다.

젊은 여기사는 포장된 구불거리는 산길을 속도를 내며 거침없이 내달렸다. 굽은 도로라 반대편 차량을 세심히 살펴야 함에도

그녀의 눈에는 큰 차만 보이는 듯했다. 저편에서 오던 승용차들은 버스를 보고 급정거하는 경우가 계속돼서 내내 불안했다. 

새삼스럽게 이곳이 이탈리아임을 진정으로 느낀 시간이었다.

 

볼차노 숙소로 돌아와 휴식하고 있던 오후 6시 20분, 어제처럼 갑자기 사이렌이 울렸다.

건물 0층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는데 밖으로 나가보니 아무 일도 없는 듯 건물 앞엔 아무도 없다.

호스트에게 이 상황을 메시지로 전달했다.

 

카레짜와 소프라볼차노를 탐색한 오늘.

볼차노의 낮 최고 기온은 33도였고 오후 9시에도 29도를 가리키고 있다.

돌로미티 기슭이 무색한, 불타는 늦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