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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4 로마·피렌체·볼차노·빈

8월 23일 (금) : 알페디시우시의 구름

볼차노 버스터미널

산을 싸인 볼차노답지 않게 어젯밤엔 기온이 내려가지 않더니 오늘 새벽 공기는 서늘하다.

오전 6시반, 미역국과 진미채와 멸치볶음으로 차린 아침을 들고 오전 8시도 되기 전 근면성실하게 숙소를 나선다.

볼차노 숙소는 구시가, 기차역, 버스터미널이 모두 500m 이내에 위치해 있어서 도보 이동이 매우 편리하다.

천천히 동네 구경을 하면서 다다른 볼차노 버스터미널이 무척 한적하다.

 

오르티세이 : 독일어(Adler:독수리)만 쓰인 건물도 있음.

오늘 우리 목적지는 서부 돌로미티의 중심도시인 '오르티세이'와 그곳에서 출발하는 산악 코스 중 '알페디시우시'다.

어제 호스트가 건네준 볼차노카드-볼차노게스트카드-로 외관에 M자 적힌 모든 버스를 무료 이용할 수 있다.

오전 8시반, 볼차노를 출발한 350번 버스는 50분 후인 9시 20분, 오르티세이에 당도했다.

 

알페디시우시 케이블카
알페디시우시 케이블카 승강장(왼쪽)

볼차노보다 작고 오스트리아 티롤 같은 예쁜 동네를 거닐면서 천천히 알페디시우시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간다.

오르티세이가 주변 산악 지대로 이동하는 기점이라 그런지 크지 않은 동네에 여행객이 상당히 많다.

알페디시우시만 왕복 가능한 티켓을 구입한 우리는 자연과 마을의 조화에 감탄하며 10시반, 빨간 케이블카에 올랐다.

 

알페디시우시 케이블카

케이블카는 살짝 무섭게 두둥실 움직여 10여분 후 드넓은 초원이 보이는 지점에 우린 내려놓았다.

여긴가, 이쪽인가, 초원을 향해 잠시 내리막길을 걸으니 와- 소리가 나는 탁 트인 광활한 초원과 병풍 같은 산이 눈앞에 드러났다.

 

알페디시우시 Alpe di siusi

그런데 오르티세이에서도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는데 알페디시우시에 올라와서도 마찬가지다.

한편은 흐리고 구름 가득하지만 반대편은 푸른 하늘을 내보이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 그러나 이곳의 백미인 돌산이 구름에 덮여있다.

웅장한 돌산 위를 헤매고 있는 구름이 걷히길 바라면서 우린 오른편으로 완만한 길을 내려가 시계 반대방향으로 산책하기로 했다.

 

알페디시우시

 

여기 완전 멋진데, 때늦은 야생화도 곳곳에 피어있고 하늘 아래 펴놓은 장대한 들판이 정말 근사하다.

그런데 알페디시우시에는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보행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깜짝 놀라고 위험천만인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고지대라 더 조심해야 하는데도 그들은 스피드에만 올인하는 듯했다. 

 

더할수없이 최고의 정경을 보여주는 알페디시우시의 8월말, 이곳을 거니는 우리의 체온이 점차 오르기 시작한다.

돌로미티가 이렇게 뜨겁다니, 세체다 대신 시야 넓고 경사 얕아 고른 코스인데, 그늘도 없이 태양은 그저 작렬하고 있다.

 

레스토랑
레스토랑 뷰
굴라쉬와 폴렌타(앞)

드디어, 호이리게 탁자가 쭉 놓여있는 야외 레스토랑에 이르렀다.

알페디시우시를 거닐기 시작한지 1시간 정도밖에 안 되었으나 뙤약볕에 그대로 노출된 중년은 벌써 방전 직전이다.

쇠고기 굴라쉬와 미트소스 폴렌타를 주문했더니 패스트푸드처럼 10분만에 뚝딱 서빙되었다.

 

레스토랑(오른쪽)
알페디시우시 : 앞서 가는 남편

레스토랑 주변의 들판엔 아이들은 뛰놀고, 어른들은 눕거나 앉아 볕과 빛을 맞고 있다.

점심을 먹으면서 쉬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나는 듯, 엄청난 경관을 즐기러 다시 힘내서 걸어볼까.

 

알페디시우시

기온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트래킹이 더 즐거웠을 텐데, 땡볕을 걷기 시작하자 다짐과는 달리 금세 지쳐버린다.

사소한 우리는 자연을 거스르지도 이겨내지도 못하니, 참으로 덥고 뜨겁고 힘겹고 가쁘고 고단하다. 

 

정경을 가리는 구름과 불타오르는 햇볕. 예상치 않은 오늘 기후가 많이 힘들고 고달프기는 하다.

그러나 고정된 자리에서 멈춰진 장면을 보는 것보다 내 발로 움직이며 시시각각 변하는, 또 나만이 만드는 대자연을 볼 수 있기에

이 여정을 후회하진 않는다. 뜨거움에 지치고 밀려, 이 대단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대한 감동이 크게 확장되지 않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알페디시우시

점심식사 후 1시간반쯤 거닐었나 보다.

구름이 물러가지 않고 있는 바위산 저편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 환상적인 전망의 카페에 앉았다. 

주문한 사과주스와 산딸기소다의 색이 심히 불량식품스럽다.

 

구름, 구름
라마(아마도)

바위산을 덮고 있는 구름층은 좀처럼 결집을 풀지 않고 있다.

한 구름더미가 떠나고 나면 하늘이 그 자리를 차지할세라 다른 구름더미가 밀려와 덮어버린다.

구름이 걷히기를 40-50분간 기다렸으나 바람을 이루지 못했고,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되돌아가는 도중 귀여운 라마를 만났다.

 

알페디시우시 : 케이블카 승강장 오가는 길
알페디시우시 : 희미하게나마 드러난 바위산

발걸음은 승강장으로 향하고 고개는 자꾸만 바위산으로 향한다.

케이블카 승강장에 거의 다다를 즈음, 배경이 온통 구름더미인 바위산은 희미하게나마 그 장엄함을 드러냈다.

아까 트래킹할 때 나와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이렇게라도 볼 수 있으니 그래도 다행인 거다.

 

알페디시우시 케이블카 승강강과 레스토랑

오후 3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티세이로 내려와 오후 4시, 볼차노행 버스에 승차했다.

오르티세이행 아침 버스에선 중국어 쓰는 여인이 대단히 시끄럽더니 볼차노 가는 버스 안에서는 극심한 난청이 의심되는,

국적 불명의 두 남녀가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다이나믹하게 떠든다. 정말로, 타인은 지옥이다.

 

늦은 오후의 볼차노도 덥다. 

체력이 고갈되어 숙소에서 1km 거리에 있는 Castel Mareccio-버스 이동 가능- 근처도 가지 못한 채 계속 휴식이다.

로아커웨하스와 초콜릿과 오렌지주스를 챙겨먹고, 탈진한 저녁 속은 비빔면으로 맛있게 달랬다.

고단하였으나, 광활한 대자연의 향연에 귀빈으로 초대 받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