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이번엔 골목길 고성이 아니라 사이렌이다.
4박 머무는 동안 3번째 듣는 소리다. 오작동인지 안전불감증인지 창을 열어봐도 아무런 반응이나 기척이 없다.
5시 40분, 빵과 치즈와 우유로 아침을 먹고 있는데 모기 두어 마리가 헌혈을 강요하고 벌마저 날아들었다.
볼차노에서도 계속 모기가 있었기에 매일 전기모기향을 켜두었는데, 떠나는 날 모기향 꺼진 틈새 공격을 한 것이다.
오전 7시, 체크아웃을 하고 볼차노역으로 움직였다.
볼차노에서 빈까지 가는 RJX는 오스트리아 철도청-OEBB-에서 운행하는 열차로, 볼차노가 출발지이라 미리 대기하고 있다.
오전 7시 50분, 기차는 오스트리아 빈을 향해 정시에 떠난다.
7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동해야 했기에 일부러 Ruhe Zone-quiet zone-에 해당하는 칸의 좌석을 예약-예약비 좌석당 €3-했다.
그런데 볼차노 다음 역인 브레사노네에서 20대로 보이는 6~7명의 남녀가 우리 앞쪽과 그 자리 건너편의 마주보는 좌석에 앉으면서
아무도 시끄럽지 않은 객차에서, 큰 소리로 10~15분을 계속 떠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각자의 일에 집중한다.
그래, 여긴 조용히 가는 칸이야, 말도 소근대야 하는 데라니까. 그렇게 쭉 조용히 가자.
그러나 나의 기원과는 달리 이들의 언행은 이해할 수 없이 계속 무한 반복되고 있다.
업무인지 학습인지 좀 집중하다가 누구 하나 말을 시작하면 서로 한참동안 독일어로 크게 떠드는 작태를 반복한다.
오스트리아 기차에는 Ruhe Zone 객차가 2칸 있고 맘껏 떠들며 갈 수 있는 패밀리존 객차도 1-2칸 있으며 나머지는 다 일반 칸이다.
화기애애하게 떠들면서 가고 싶으면 패밀리 칸이나 일반 칸도 있는데 왜 굳이 조용히 가고자 하는 승객을 힘들게 하는지.
활기찬 칸에서 다른 사람들이 시끄러운 건 싫고, 자기들은 조용한 칸에서 마음껏 떠들고자 하는 심사이니, 참으로 이기적이다.
볼차노를 비롯한 남티롤 지역의 주민들은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젊은이들도 이탈리아어와 독일어에 다 능숙-볼차노 숙소 호스트의 말-
하다고 하는데, 사용하는 독일어 억양으로 미루어 저들은 행선지인 빈 시민이 아닌 그들의 출발지인 남티롤 주민인 듯하다.
조용히 가려 이 칸을 예약했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불만스러워하니 남편은 저 정도 얘기도 못하냐며 되묻는다.
어이없어서, 상황 파악이 안되나, 이게 그저 일회성으로 말 몇 마디하는 상황인가, 여행객이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뭔가를 해달라 요구한 것도 아니고, 왜 쟤들 역성을 드는지, 왜 또 말리는 시누이 노릇이냐고.
정숙 칸에서 지속적으로 떠드는 사람들이 잘못인데, 그들에게 항의한 것도 아닌데, 오히려 나를 몰아부친다.
아, 느닷없이 공감력이 사라지는 성향을 가진 자와의 동행, 이 피곤한 행태를 해제할 때가 되었나 보다.
난 Ruhe Zone 객차의 예약비까지 낸 원래 자리에서 가장 먼 뒤쪽 빈 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쪽은 세상 조용한 천국이다. 다들 고요히 쉬고 있는 이곳이 정상적인 Ruhe Zone인 것이다.
기차는 10시경 인스브루크에 멈추었고 낮 12시, 잘츠부르크에서 승객들이 많이 타기에 내 자리로 돌아왔으나 그들의 몰상식은 여전하다.
'뒤로 가봐, 저긴 천국이야, 조용히 해야 하는 이 객차에서 쟤들만 떠들어.'란 내 말에 남편은 뒤늦게 공감하는 시늉을 한다.
빈 마이들링역-사실 여기서 호텔 가는게 더 가까움-에서 그 무리들이 내렸고 우리는 다음 역인 빈 중앙역에서 오후 3시, 하차했다.
올 여름부터 빈 교통권이 개편되었기에 우린 미리 wienerlinien 앱을 통해 1주일권을 구입했다.
지하철 U1와 U3 그리고 46A 버스를 타고 '오스트리아 트렌드호텔 슐로스 빌헬름넨베르크 빈'이라는 긴 이름의 호텔에 순조롭게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느 할머니가 웃으며 '호텔?'이라 하길래 대답했더니 호텔 방향을 가리킨다.
호텔은 버스정류장 바로 앞이라 한눈에 보이지만, 현지인이 베푸는 작은 친절은 찌뿌둥했던 여행자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Austria Trend Hotel Schloss Wilhelminenberg는 '슐로스'라는 명칭처럼 1781년에 지어진 궁전을 호텔로 사용하고 있다.
우린 오후 4시 이전에 호텔 체크인을 했으며, 궁전이었던 곳이라 호텔 곳곳이 예쁘지만 2박 동안 지낼 객실도 딱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 빈에서 거주-빈 근교 6개월, 빈 3년반 거주-하고 이후 빈 여행을 할 때도 늘 아파트를 빌려 지내다보니 빈 호텔에서 숙박한 적이
없는데, 2년 전 우연히 이곳에 들렀을 때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교통이 좀 불편함에도 꼭 묵어보고 싶었다.
오후 5시 50분, 46A 버스-4정거장-를 타고 타펠슈피츠-갈비탕 비슷-로 유명한 Plachutta에서 운영하는 Gruespan으로 간다.
실내 자리도 넓지만, 덥지 않은 날의 여름 저녁을 즐기기엔 야외 자리가 제격이다.
우린 시원한 생맥주를 요청하고 쯔비벨로스트브라텐-튀긴양파 올린 쇠고기요리-과 비너슈니첼을 주문했다.
이 분위기 어쩌지, 진짜 현지인들 가득한 빈 변두리의 야외 레스토랑은 빈에 거주하던 그때로 우리를 실어날라 주었다.
비너슈니첼은 평범하고 쯔비벨로스트브라텐은 맛있었다.
체구가 아주 큰, 친절하고 유쾌한 서버 덕분에 더 즐거웠던 시간.
레스토랑 야외 공간이 활짝 트이고 아주 넓어서 더욱 편안하고 쾌적했던 것 같다.
다시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정원을 산책한다.
호텔은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은 편-베르크는 산-이라 주변 전망이 가능해서 슬슬 소요하기 참 좋았다.
오랜 만에 오스트리아 TV 채널을 돌리는 이 시간이 기쁘고 평온하다.
2022년에 남편과 한 달, 작년엔 친구들과 엿새동안 머물렀던 빈인데 그새 또 이곳이 그리웠나 보다.
이른 새벽부터 움직여 고단한 오후 9시, 잠자리에 들 시각이다.
'표류 > 2024 로마·피렌체·볼차노·빈'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월 28일 (수) : 빈 국회의사당 앞에서 (0) | 2025.01.15 |
---|---|
8월 27일 (화) : 빈의 구시가 성당 (0) | 2025.01.14 |
8월 25일 (일) : 산타막달레나 가는 걸음 (1) | 2025.01.13 |
8월 24일 (토) : 카레짜 그리고 소프라볼차노 (0) | 2025.01.12 |
8월 23일 (금) : 알페디시우시의 구름 (0) | 2025.01.10 |